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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윤의 구원론   < 그리스도의 대속(Redemption)이 없는 기독교 >     한종희 목사



차     례
Page 1  1.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할 이유
 2. 사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
 3. 그림언어(metaphor)
Page 2  4.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사건이다
Page 3  5. 육체부활 부정과 새 부활관 제시
 6.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7.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 적용
Page 4  8. 구원의 종말적 구조
 9. 종말과 구원
10. 결론



김세윤 교수 1 의 저서 「구원이란 무엇인가?」2 (이하 김세윤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를 "김세윤"으로 약칭함) 170여 페이지로, 15판이나 발행한 책이다. 이 책에 나타난 김 교수의 구원론을 정통신학과 비교하여 비평하고자 한다. 김세윤의 신학은 20세기의 진보신학이다. 성서를 상징과 은유로 보아 해석하며, 전설과 신화가 섞여 쓰인 설화(고대소설)로 보아 해석하기 때문에, 일체의 기적을 배격하였고, 윤리신학을 구성하였다.


1.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 (김세윤, pp.11-24)

1) 죽음과 구원의 정의

김 교수가 인간이 구원 받아야할 이유는, 인간이 죽어 있고, 죽음 아래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죽음이 어떠한 죽음인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인가? 김 교수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 구원을 부정하였다. 죽음을 단지 인간이 지상에서 겪는 “악행과, 자원의 제한에서 오는 고난”으로 규정하였고, 구원도 현세에서 겪는 “악행과, 자원의 제한에서 오는 고난”에서 해방 받는 것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김 교수의 신학에는 내세의 형벌이나 영생은 없다.



구원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짓, 불의, 증오, 개인적인 결핍이나 아픔, 이웃과의 갈등,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갈등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악과 고난에 둘러싸이고 짓눌려 있습니다. . . 그러기에 모든 악고난의 현상들은 죽음의 증상들이요, 우리가 그런 악고난에 짓눌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죽음의 힘 아래 놓여 있고, 감기에 걸리듯 우리가 죽음에 걸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과, 고난에 짓눌려 있는 인생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 . 이 죽음과 그 증상들인 모든 악고난에서 해방되는 것구원입니다. 우리가 이 구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죽음과 그 증상들인 악과 고난에 결려 있기 때문입니다.』(김세윤, pp.12-13)

『 인간의 모든 고난과 불행은 자기의 자원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한된 자원 속에 갇혀서 사는 것이 곧 죽음이요, 고난입니다. 이 제한된 자원에서 해방되는 것구원입니다. 』 (김세윤, p.73)


두 번 인용한 글의 주제는 죽음과 구원이다. 김세윤의 신학은 오직 지상에서 겪는 “악행과, 고난과, 자원의 제한”을 죽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구원도 역시 지상에서 겪는 “악행과, 고난과, 자원의 제한”에서 해방 받는 것으로 보았고, 성서와 사도신경이 말하는 육체부활과, 내세의 영생과 영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침묵하였다.

2)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의 정의)


『 영생이란 악과 고난으로 얼룩진 인생을 여름날에 “엿가락을 늘이듯 길게 늘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단지 “물리적인 시간을 길게 늘려 놓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영생이란 근본적으로 “신적인 삶”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의 됨됨이에 참여하여, 곧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 된 그의 특권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나의 것으로 받아, 나의 삶이 가난한 삶이 아니라, 신적인 풍성한 삶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도무지 지혜가 없어서 불안하고, 능력이 없어 두려우며,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죽어 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즉 그 무한한 사랑과 그 영원한 시간에 동참하는 신적 삶인 영생을 누리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이며, 시간적으로도 하나님의 영원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피조물성 곧 우리의 제한성, 그 제한성으로 인한 인간의 모든 고난에서 해방되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임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풍성한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 (김세윤, pp.76-77)


A.  이 인용문의 주제는 영생이다. 정통신학은 성서의 주장대로 인간이 사후에 다시 부활하여, 내세(來世)에서 시간적으로 끝없이 사는 것을 영생이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요(눅23:43; 마16:27, 24:30, 26:64), 사도들과 교부들이 사도신경으로 고백했던 바요, 교회가 2천 년간 가르쳐온 바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영생엿가락을 늘이듯이 길게 늘이거나, 물리적인 시간을 길게 늘려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내세의 영생을 부정하였다. 김 교수는 바로 앞에서도, 죽음을 현세(現世)에서 겪는 “악행과 고난과 자원의 제한”으로 규정하여 來世와 차단하였고, 구원도 現世에서 겪는 “악행과 고난과 자원의 제한으로부터 해방 받는 것”으로 규정하여 來世와 차단하였는데, 여기서도 영생은, “물리적인 시간을 길게 늘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역시 시간의 영속(永續)인 來世와 차단하였다.

B.  영생은 來世의 영생이 아니라, 지상에서 누리는 신적인 삶을 뜻한다고 하였다. 이 신적인 삶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됨됨이(성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삶에 동참하는 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 교수가 죽음과, 구원과, 영생을 現世로 한정하였으니, 이 신적인 삶도 역시 現世뿐이다. 20세기의 모든 현대신학(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 복음주의)이 삶을 來世와 차단하고, 現世의 삶으로만 주장해왔는데, 김 교수의 주장도 같다.

C.  김세윤 교수가 영생을 해설하면서, 정통신학의 용어만을 사용하여 해설한 표현들(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신적인 삶인 영생)을 독자들이 대하면, 김 교수가 마치 내세(來世)와, 영생(永生)을 믿은 것처럼 보일 것이지만, 김 교수가 이미 앞에서 내세(來世)와 영생(永生)을 배격하였고, 또 이 표현들은 단지 상징과 은유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열거한 표현들은 지상생활이 그 만큼 풍요로울 것을 묘사한 것뿐이고, 내세나, 영생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만일 독자들이 이 문장을 문자대로 읽어, 실제의 來世와 永生으로 읽으면, 곡해하는 것이다.




2.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교훈을 받았다고 하였다. (김세윤, pp.25-29)


「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 예컨대 불교나 힌두교나 이슬람교 같은 종교들뿐만 아니라, 유사 종교 가령 마르크스주의나 인류 문명에 대한 낙관론 같은 것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 . 그러나 1,2차 세계 대전은 이러한 낙관론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 . 두 세계 대전은. . . 인간의 근본 문제인 악과 고난을 이성의 계발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이후 신학자들은 죄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종말론에 대해 더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김세윤, pp.28-29)


김 교수는 주장하기를, 기독교가 아닌 모든 다른 종교들(불교, 힌두교, 이슬람교)과, 유사종교인 공산주의와, 기타 문명 낙관론자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1,2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낙관론을 잿더미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김 교수의 말은 사실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과학 기구들이 살인마로 돌변하여, 인류의 종말을 재촉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젊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일어나 인류문명의 구제책을 논하고, 인성회복 운동을 펼쳤다. 20세기 전반세기에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바르트, 불트만, 부루너, 라우셴부쉬, 틸리히, 니버 형제 등 당시 30대의 젊은 신학자들이, 인간에게는 전혀 스스로 일어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계 인류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인성을 회복하고 윤리를 회복하자고 외쳤다. 또한 철인들도 1,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 충격을 받아, 인류와 문명의 구제책으로서, 생의 철학, 실존주의 철학, 분석철학 등을 일으켜, 전범들의 악행을 성토하며, 인성과 윤리를 회복하자고 외쳤던 것이 사실이다.




『 이와 같은 사상적인 변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명의 발달에 대해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이 가진 지혜와 이성과 힘으로 언젠가는 모든 악과 고난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구원받아야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완전할 때에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내재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에 있고, 우주 밖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우리 밖에서(extra nos), 우리를 위하여(pro nobis) 구원의 힘이 와야 합니다. 우리 밖에 무한한 힘을 가진 초월자로부터 우리 위해 오는 것이어야만, 즉 은혜로 올 때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김세윤, p.28-29)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준비하였으니, 그것이 “복음”이라고 하였다. 다음 항에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구성된다고 하였고, 이 복음이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라고 하였다. 다음 항에서 김 교수가 복음(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자세히 해설하였으나, 은유(metaphor)로 해설하였다.
김 교수가 “복음” 해설에 은유(그림언어, metaphor)를 적용하였는데, “복음”을 살피기 전에, 먼저 김 교수가 은유를 “복음” 해설에 적용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왜냐하면, 김 교수가 구약의 “복음”(제사, 화해, 구속, 새 언약)과 (김세윤, pp.53-58), 신약의 복음(칭의,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을 은유로 취급하여 해석하기 때문에, 김 교수가 은유(metaphor)를 "복음해설"에 적용하는 이유를 알아야만, 김 교수가 주장하는 복음의 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림언어(metaphor) 3




성경은 이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네 가지 그림(metaphor)으로 표시했습니다. 즉 의인 됨(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 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 등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이와 같은 그림 언어들을 사용하여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이 주관적인 구원 사건의 실재(reality)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what he is, 71쪽)에 참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what he has done, 71쪽)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주관적 구원 사건의 실재(reality)를 여러 가지 그림으로 나타냅니다. 하나하나 살펴봄으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김세윤, p.69-70)

『 이런 의인 됨이나, 화해함 또는 뒤에 더 언급할 그림들(metaphor)이 나타내는 구원의 실재(reality)는 다 똑 같습니다. 다만 이런 그림들을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서 구원의 실재를 더욱 분명히 나타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림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실재가 중요합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자기의 제한된 자원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원에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실재입니다. 』(김세윤, p.74-75)

『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의인 됨, 하나님과 화해함, 하나님의 자녀가 됨, 새로운 피조물 됨 등의 그림들로 표시하려 한 구원의 실재(reality)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제한된 자원 속에 갇혀 죽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끌어다 씀으로서 신적인 삶에 참예하는 삶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김 교수가 말한 그림 언어와 은유는, 동일한 metaphor의 번역이니, 동일한 뜻이다.) (김세윤, p.80-81)


이상의 인용문에 나타난 내용을 정리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서는 네 가지 그림으로(칭의, 화해, 양자, 새 피조물) 주관적인 구원을 설명한다.
ⓑ 주관적인 구원에는 네 가지 그림(칭의,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이 있고, 실재(reality)가 있다.
그 구원의 실재(reality)는 그리스도의 됨됨이에 참예하고, 하신 일에 참예하고, 하나님의 자원(율법과 교훈)을 힘입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신적인 삶이다.

이 인용문에는, 김 교수가 구원해설에 그림언어를 끌어드린 내막이 들어있다. 김 교수가 구원을 성경대로 해설하지 않고, 그림언어로 해설한 이유가 무엇인가? 독자들은 김 교수가 그림언어를 구원해설에 끌어드린 이유부터 물었어야 한다. 정통신학은 성서의 교훈을 문자대로 믿기 때문에, 구원해설에 그림언어를 적용하지 않고 문자대로 신학을 해설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성서의 교훈을 문자대로는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림언어를 적용하여 그림의 실체를 교훈으로 받는다.

1) 은유의 정의

은유는 비유이다. 비유에는 직유와 은유가 있다. 직유와 은유가 어떻게 다른가? 직유는 두 문장으로 말하고, 은유는 한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 다르다. 은유는 한 문장뿐이기 때문에, 한 폭의 그림과 같아서, 그림언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폭의 그림에는, 그림과 속뜻이 함께 있듯이, 은유도 한 문장 안에 문장과 속뜻이 함께 있다.

      직유 - "전신주가 키가 큰 것처럼, 저 사람은 키가 크다."
                 전 문장은 껍질(shell)이고, 후 문장은 실체(reality)이다.
      은유 - "저 사람은 전신주 이다."
                 “저 사람은 전신주 이다”는 껍질(shell)이지만, 이 껍질 안에,
                 “저 사람은 키가 크다”는 실체(reality)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은유적용의 사례를 보기 위해서, 앞에서 인용한 3 개의 문장에서, 첫 번째 문장을 다시 적는다.




성경은 이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네 가지 그림(metaphor)으로 표시했습니다. 즉 의인 됨(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 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 등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이와 같은 그림 언어들을 사용하여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이 주관적인 구원 사건의 실재(reality)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what he is, 71쪽)에 참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what he has done, 71쪽)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주관적 구원 사건의 실재(reality)를 여러 가지 그림으로 나타냅니다. 하나하나 살펴봄으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김세윤, p.69-70)


김 교수는 성서가 말하는 칭의,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을 구원을 설명해주는 그림이라고 하였고, 이 네 가지 그림이 말해주는 구원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hat he is, p.71)에 참예하고, 하신 일(what he has done, p.71)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세윤 교수가 그림실체에서, 그림(칭의,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은 버리고, 실체(그리스도의 됨됨이와, 하신 일)를 취하였다. 그러나 김 교수가 그림으로 취급하여 폐기한 주관적인 구원(칭의,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은 기독교가 믿어온 은혜구원이고, 김 교수가 실체라 하여 취한 구원(그리스도의 됨됨이와, 하신 일)은 행위구원이다. 결국 김 교수가 기독교 구원해설에 그림언어를 적용하여, 얻어낸 것은 은혜구원을 버리고, 행위구원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가 기독교의 구원으로 취한 행위구원은, 기독교의 구원관이 아니다. 이교의 구원관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할례 파 교인들이 율법 지키는 행위를 구원의 실체(reality)로 주장하여, 은혜구원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을 때에, 할례파 교인들을 배교자로 규정하였고, 저주까지 하였다(갈1:8-9; 2:18; 5:10-12). 그러므로 김 교수가 기원해설에 그림언어를 적용하여, 은혜구원을 폐기하고, 행위구원을 기독교의 구원으로 주장한 것은, 기독교 구원관의 전환(conversion)을 의미하며, 기독교가 불교, 무슬림, 힌두교 등과 동일한 종교가 되어지기 때문에, 다원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2) 이교운동이 성행하는 이유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자, 왜 기독교의 은혜구원을 폐기하고,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이교운동이 성행하였는가?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른 20세기 현대인들이, 비록 성서를 문자대로는 믿지 않지만, 핵전쟁을 막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성서를 교재로 사용하여 핵잰쟁을 막아보자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운동이 K. Barth(1986-68)와 R. Bultmann(1884-76)을 시발점으로 했던 신 정통주의 신학 운동이고, Harold J Ockenga(1905-85)와 Billy Graham(1918-)을 구심적으로 했던 영국과 미국의 신 복음주의 운동이었다.

김 교수가 구약과 신약의 은혜구원그림으로 취급하여 은혜구원은 버리고, 행위(윤리)를 구원의 실체(reality)로 주장하였듯이, 김 교수가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과, 죽음과, 부활도 그림으로 취급하여, 기적은 버리고, 그림을 해석한 교훈을 구원의 실체(reality)로 받았다.

김 교수가 구약신약복음을 그림으로 처리한 것이나, 그리스도의 과, 죽음과, 부활을 그림으로 처리한 것은, 비단 김 교수뿐만 아니라, 진보주의 신학자면 누구나 동일하게 행하는 방법이다. 김 교수가 일체의 기적을 믿지 않지만, 기적을 믿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을 들어내 놓고 말할 수가 없어서, 은유라는 용어를 끌어드려, 자신의 정체성을 은폐하듯이, 다른 신학자들 역시 자신의 기적불신을 덮어서 들어내지 않기 위하여, 각자 취향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들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K. Barth는 31권(9,000쪽)의 교회교의학을 출판하여, 기적을 설화(geschichte)로 표현하여 자신의 기적불신을 은폐하였는데, 미국의 신학자들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설화(geschichte)와, 역사(historie)를 일률적으로 역사(history)로 번역하여, 바르트신학을 오도하였고 4, Klooster와 Van Til이 Barth에게 설화의 뜻을 물었지만, Barth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5. ⑵ R. Bultman은 기적을 신화(mythe)로 취급하였음으로, 사람들이 Bultman의 신학이 신화의 신학임을 쉽게 이해하였다. ⑶ James I. Packer는 기적들을 신비(mystery), 설화(story), 소설(fiction)로 취급하였고, ⑷ Kierkegaard는 역설(paradox)로 취급하였고, ⑸ Billy Graham은 신비(mystery)로 취급하였는데, ⑺ 김세윤은 은유(metaphor)으로 취급한 것이다. 신학자들이 이 용어들을 사용한 이유는 동일하니, 성서에서 기적은 배제하면서도, 기적불신의 정체성은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3) 은유를 적용한 다른 사례들

김 교수가 성경해석에 은유를 적용한 사례들이 더 있다. 사도들이 선포했던 복음(죽음, 부활)을 그림(metaphor)으로 처리하였다. 6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사도들은 주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에서 얻은 다양한 그림언어들(imageries; metaphors)을 동원하여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대표적인 몇 개만 들어 여기서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설명하는 이런 그림들(imageries; metaphors)과 함께, 사도들은 예수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보다 긍정적인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그림(imagery; metaphor)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 . . 그리스도의 죽음을 출애굽 당시 희생된 “유월절 양”의 그림(imagery; metaphor)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구약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신약)을 그림언어(metaphor, imagery)이라고 하였다. 김 교수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14폐이지(151-163)나 되는 분량으로 해설하였지만, 결론에서는 다 그림(metaphor)과 상상(imagery)으로 처리하였다. 그림과 상상은 실체(reality)가 아닌 껍질(shell)이고, 그 속뜻이 실체이다. 다음 글에서 껍질과 실체를 가려내 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가, 곧 그 작용원리(modus operandi)를 설명하기 위해 사도들은 구약 성경의 성전 제사에 대한 가르침과,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지침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버린 제사” 또는 “덮어버린 제사”(expiatory sacrifice: 속죄 제사)였다고 설명하기도 하고, ⓑ 그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우리의 죄에 대하여 “벌(저주) 받음”이었다고 설명하고, ⓒ 그리하여 그것은 결국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린 제사”(propitiatory sacrifice)였다고 설명했습니다(예:롬 3:24-25; 8:3; 고후 5:21; 갈 3:13; 히 9:12; 벧전 3:18; 요일 2:2; 4:10).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죄와, 죄가 가져오는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죄를 통해 우리 위에 군림하는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속량”(사서 해방; redeem)한 것입니다(예: 롬 3:24; 고전 1:30; 갈 3:13; 4:4-6; 엡 1:7, 14; 골 1:14; 히 9:15).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을 “의인들”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죄인들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설명하는 이런 그림들(metaphors)과 함께, 사도들은 예수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보다 긍정적인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그림(metaphor)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고전 11:23-26; 히 9:15). 』 8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가? 사도들은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얻어낸 그림(metaphor)으로 해설하였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고, 덮은 제사”는 그림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대신 벌 받아, 하나님의 진노를 푼 것”은 그림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속박에서 속량한 것은 그림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고,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속박에서 속량하였다는 것은 다 그림(metaphor)이라고 하였다. 필자가 앞에서 말했듯이, 그림(metaphor)은 껍질(shell)이고, 그림의 실체(reality)는 따로 있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그림(metaphor)을 해설한 것이고, 그림의 실체(reality)는 다음 문장에서 말했다.




『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첫 아담의 불순종에 반한 “마지막 (즉 종말의) 아담”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옛 창조의 조상 아담이 지워준 숙명, 곧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뒤틀린 관계를 청산하고, 그가 새 창조의 조상으로서 회복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참여시켰기 때문입니다(롬 5:12-21. 』 9


김 교수가 앞의 인용문에서 말했던 여러 그림들의 실체(reality)가 들어났다. 곧 새 언약의 실체가 들어난 것이다. 그 새 언약의 실체가 무엇인가? 첫 아담이 실패한 순종을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순종에 성공하여, 비로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것이 “새 언약의 실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순종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새 언약의 성취이고, 구원이라고 하였으니,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순종을 구원의 실체(reality)로 취하였고, 대속으로 주어지는 은혜구원을 구원의 그림(metaphor or imagery)으로 취급하여 폐기해버렸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해설한 새 언약의 실체(reality)에는, 그리스도의 대속(atonement)이 없다. 죽음과 지옥의 형벌에서 해방시킴도 없다. 몸이 부활하게 하여, 천국에서 영생하게 하는 구원도 없다. 단지 예수님이 보이신 모범을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지상에서 거룩하고 화평하게 살아, 지상천국을 이루어가는 것이 구원이니, 곧 윤리구원이고, 현세의 구원이다. 김 교수의 해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김 교수가 유월절 양의 죽음과(155쪽),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림으로 보았고, 이 두 그림의 실체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분명히 기독교의 은혜구원을 행위구원으로 전환한 것이다.

다음 문장을 읽어보면, 김 교수가, 마치 죽음이 부활을 거쳐 천국에 가는 길인 것처럼 말하였고, 부활과, 내세와, 영생도 김 교수가 실화(nonfiction)로 믿고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metaphor)로 말한 것이지, 실화(nonfiction)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림은 실화(nonfiction)가 아니고, 소설(fiction)이다. 진보주의 신학자들이 초자연을 믿지 않기 때문에, 초자연(하나님의 물질창조, 그리스도의 신성, 육체부활, 내세, 천사 등)을 말할 때에는 그림이나, 그림언어에 해당하는 신학용어를 사용하였으니, 그림에 해당하는 용어들은, 신화(myth), 설화(geschichte), 역설(paradox), 신비(mystery), 상징(symbol), 은유(metaphor), 소설(fiction) 등이 있다. 이 용어들은 단지 상상(imagery)이나 그림(metaphor)이고, 실화(nonfiction)나, 역사(history)가 아니다.

다음은 김 교수가 그림으로 그려낸 문장이다. 그림인 줄 모르고 읽으면, 틀림없이 정통신학이다.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재림 때 완성될 구원의 “첫 열매”, 곧 “보증금”을 받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부활로 결정적으로 깨지기는 했으나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죽음의 쓴 맛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음으로 죽어도 계속 그리스도 안에, 그의 생명의 영역 안에 있게 됩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시험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됨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 있을 때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농도를 더 진하게 체험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자들의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고전 15:51; 살전 4:13-18),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표현되기도 하면서 그것이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빌1:23), 누가는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끝도 아니고 절망적인 비극도 아니며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는 것이고, 이생에서 이미 “첫 열매”의 형태로 체험하기 시작한 그의 부활의 생명을 좀 더 농도 진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고로 “훨씬 더 좋은 것임”)을 말하기 위하여, 신자들은 죽음을 통하여 벌써 “낙원”에 가는 것으로 그린 것 같습니다(눅23:43).
그러나 신약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여 그의 구원의 완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때까지의 죽음의 상태는 “잠들어” 대기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요 5:25-29; 고전 15:52-57; 고후 5:1-10; 살전 4:13-18; 히 9:27-28; 11:13-16; 계 6:9-11, 20:4-6, 11-15).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죽음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완성을 아직 기다리는 상태라는 것, 곧 양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기 위해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하늘의 제단 아래서 당분간 대기하며 쉬고 있는 것으로 그립니다(계 6:9-11).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의 그림대로 우리는 성도들의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며, 쉬도록 하늘로 부름 받음(召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 10


김 교수가 마치 성경이 말하는 대로 죽음과, 부활과, 내세를 말하는 것처럼 글을 쓰다가, 후반부에서는, 죽음과, 부활과, 내세를 그림과, 추측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러면 그림과 추측으로 마무리 한 부분을 정리해 본다.

  신자들은 죽음을 통하여 낙원에 가는 것으로 그린 것 같습니다.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하늘의 제단 아래서 당분간 대기하며 쉬고 있는 것으로 그립니다(계 6:9-11)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의 그림대로, 우리는 성도들의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며, 쉬도록 하늘로 부름 받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김 교수의 신학이 현대신학이기 때문에, 일체의 기적이나 내세를 믿을 리가 없음으로, 김 교수에게는 죽음이 인간의 끝이고,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사(history)가 아니고, 신화(mythe-Bultmann)이며, 실화(nonfiction)가 아니고, 설화(geschichte-Barth)이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기적의 사건들을 그림추측으로 마무리하여, 복음에서 기적을 배제한 것이다.

4) 은유해설의 결론

이상으로서 김 교수가 복음해설에 은유 비유를 적용한 이유가 분명해졌다. 김 교수는 복음해설에 은유를 적용한 덕분에, 기독교가 2천 년간 지켜온 은혜구원을 노골적으로 부정하지 않고도, 행위구원을 기독교의 구원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 만일 김 교수가 복음해설에 은유를 적용하지 않고, 은혜구원을 직설적으로 부정했다면, 김 교수가 기적과 내세를 믿지 않는 사실이 훤히 들어났을 것이고, 정통신학의 강력한 공격에 부딪쳤을 것이다. 정통신학이 지배하는 한국교회의 공격이 오죽했겠는가! 김 교수가 지금까지 보수주의 신학계에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은유를 신학해설에 적용한 덕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문제 하나를 더 말하고자 한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이 정통신학을 배격하는 자기의 정체성을 가려 은폐하기 위해서, 가진 노력을 다 기우려왔으며, 은유 적용은 그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여기서 더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이 중대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해설코자 한다.

  20세기 현대신학의 정체성 은폐
  20세기 현대신학의 전제(presupposition)
  현대신학과 현대철학의 혼합

A. 20세기 현대신학의 정체성 은폐

현대신학이 신학해설에 은유나, 신화나, 설화나, 역설이나, 신비를 적용하는 내막을 몰라서, 현대신학 이해가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현대신학이 신학용어 외에도, 가진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정통신학을 배격하는 자기의 정체성을 철저히 은폐하기 때문에, 현대신학 이해가 더 어렵다. 18세기까지는 정통신학만 있었음으로, 신학용어도 하나의 뜻으로만 쓰였고, 19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이 일어났어도, 정통신학과의 차이가 분명하여, 자유주의 신학 이해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현대신학(신정통주의, 복음주의, 신복음주의)은 가진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기적불신을 은폐하기 때문에, 정통신학과의 차이점을 이해하기가 심히 어렵다. 20세기의 현대신학도 자유주의 신학처럼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고, 성서의 기적들을 신화로 보지만, 그러나 가진 방법을 다 동원하여, 좀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20세기의 현대신학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점은 우리가 반듯이 짚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현대신학이 기적불신을 은폐하는 이유와, 은폐하는 방법을 나누어 말하고자 한다.

a.  20세기의 현대신학이 기적불신을 은폐하는 이유

19세기는 계몽사상이 지배하여 성서를 이해할 수 없는 신화라고 단정 지었고, 성서는 무가치한 고전, 전설, 고대소설로 취급하였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맞았고, 러시아의 혁명(1917)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과, 힛틀러(1934-1945)의 광증까지 겹쳐 파괴, 학살, 약탈이 이어졌고, 인류와 문명을 핵전쟁에서 구하여 보존해야 한다는 운동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특히 기독교에서 성장하였으나, 계몽주의를 수용했던 30대의 젊은이들이 성서의 기적은 불신하되, 성서만이 인류와 문명을 치료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성서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기적불신은 최선을 다해 은폐하였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서해석학을 발전시켰다. 왜냐하면 신학생들과 교인들이 성서와 기적을 실화(nonfiction)로 믿기 때문에, 성서와 기적을 전설과 설화로 보는 현대신학을 배격하였기 때문이다.

b.  20세기의 현대신학이 기적불신을 은폐하고자, 발전시켰던 성서해석학

  20세기의 현대신학(복음주의, 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은, 절대로 정통신학을 정면에서 직선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만일 정통신학을 정면에서 부정하거나 공격하면, 기적을 믿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이 노출되기 때문에, 반드시 간접적으로나, 우회적으로 부정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덮고, 두 신학의 차이를 덮어 은폐한다. 그러므로 정통신학과 현대신학의 차이를 알아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은, 성서를 신화로 취급하지만, 성서를 노골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성서에 은유나, 신비나, 설화 등을 적용하여, 성서를 신화로 취급하는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20세기의 현대신학이 배교신학임을 사람들이 좀처럼 알아보지 못한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은, 성서를 신화로 취급하여 모든 기적을 불신하지만, 자기의 신학을 직설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여러 경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장하여, 기적불신을 은폐하기 때문에, 현대신학이 배교신학임을 사람들이 좀처럼 알아보지 못한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이 기적을 불신하지만, 정통신학의 용어만을 사용하여 신학을 해설하기 때문에, 현대신학이 배교신학임을 사람들이 좀처럼 알아보지 못한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은, 그 발생 동기나 목적이 현대철학과 동일하기 때문에, 현대신학 해설에 철학을 적용하여 해설하므로, 현대신학 이해가 지극히 어렵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은, 분석철학을 신학해설에 적용하여, 모든 용어와 표현에서 먼저 기적을 제거하는 작업을 펴지만, 분석철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현대신학을 접하면, 이해가 되지 않아, 골치를 앓는다. 분석철학으로 문장을 분해하고, 분석하여 문장에서 기적과 초자연을 제거하되, 이 작업을 지극히 은밀하게 진행하기 때문에,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필자는 1956년에 바르트의 계시관이 이해되지 않아, 골치를 앓다가 작심하고 지금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한 결과, 지금은 현대신학 해설을 쓰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20세기의 진보신학은 기적을 불신하고 배격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은폐하기 위해서, 가진 방법을 다 동원하고, 갓 가지 표현들을 다 동원하여 신학을 해설하기 때문에, 먼저 고도의 문장 술을 적용하여 발전시킨 고난도의 성서해석학을 익혀야만 이해할 수가 있다. 다음에 소개할 전제(presupposition)도 20세기 현대신학 이해에 필수적이다. 전제를 무시하고는 현대신학 이해는 불가능하다.

B. 20세기 현대신학의 전제

19-20세기의 현대신학에는 전제가 있다. 그 전제는 신학구성에서 반드시 계몽사상을 따르고, 기적을 배제하는 것이다. 전제는 한번 정해지면, 그 다음의 글은 반드시 이 전제 안에서 쓰이기 때문에, 전제 안에서 읽고, 전제 안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수학이 공리를 전제하고 출발하듯이, 어떤 학문도 전제 없이는 착수하지 못한다. 유물론자들은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을 전제하고 출발하지만, 정통신학은 하나님의 물질창조를 전제하고 출발한다. Bertrand Russell은 창조가 믿어지지 않아서, 신자가 되지 못하였다고 했지만, 한국의 창조과학회를 이끌어온 물리학 김영길 교수는 결혼할 당시 전도 받았을 때에, 물리학이 안고 있는 근원(origin)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의 물질창조(창1:1)에서 찾았기 때문에, 기독교를 성서대로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필자가 본인의 간증에서 들은 이야기다.
하나님의 물질창조는 정통신앙의 전제이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의 물질창조를 믿고, 창조의 지혜와 권능으로 성서도 정확무오하게 기록하고, 편집하고, 보존해왔음을 전제하고 출발한다. 그러나 현대신학은 신의 실재(reality)를 불신하여, 성서를 인간의 작품으로 보기 때문에, 신의 출현과 활동이 적힌 성서를 신화와 전설이 섞여 쓰인 고대소설(설화-geschichte)로 전제하고 출발한다. Van Til 이 하나님의 물질창조와 성경무오를 전제하고 정통신학을 변증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라고 하였다. 11
김 교수가 신학구성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삭제하였으니, 이것을 전제하고 그의 책을 읽으면 어려울 것이 없듯이, 인간에게는 현세뿐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전제하고, 바르트신학을 읽으면 어려울 것이 없다. 다음은 Karl Barth가 인간을 죽음으로 끝나는 유한자로 본 글이다.



「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에 그 생명이 시작함과 같이, 또한 인간은 죽을 때에 그 생명이 끝나고, 끝난 후에는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12

「 인간의 생명이 긴 것이냐 짧은 것이냐를 놓고 논란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단순히 태어나서 빨리 혹은 느리게 죽음으로 나가는 운동에 불과하며, 인간은 오직 이렇게만 살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생명이라는 것은 마치 돈이 필요하여 빚을 얻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빚은 일정한 기간 안에 반드시 되돌려 주어야 하듯이, 생명도 일정한 기한 안에 받았던 대로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을 싫어하는 자는 사람 자체도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 때문에, 그 유한성을 저항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저항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이 유한성을 도피하려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 그늘을 뛰어넘는 편이 쉬울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유한성에서 도피하여 영생을 누리려하거나 자신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며, 자기 파멸로 끝나게 할 뿐이다. 인간이 시작과 끝이라는 괄호 안에 갇혀서 오직 유한한 시간을 살고 가는 것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 13


이 바르트의 글은 뜻이 분명하다.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이 바르트의 고백이다. 바르트가 인간의 수명을 현세로 한정함을 전제하고, 바르트신학을 읽으면 어려울 것이 없다. 현대 지성인의 대변자로 알려진 B. Russell(1872-1970)이 정신활동을 단지 뇌의 활동이라 하여, 영혼의 실체(reality)를 부정한 유물론자였듯이 14, Barth가 인간을 현세로 한정하여, 육체부활과 내세를 부정하였으니, 하나님의 실재(reality)를 믿지 않는 Russell과 함께 유물론자였다.

C.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혼합

  20세기의 현대신학은 신학에서 기적을 완전히 제거하였음으로, 기적이 없는 현대철학을 적용하여 현대신학을 해설하기 때문에, 현대철학을 모르면, 현대신학을 이해하기 어렵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이, 신학해설에 현대철학을 섞는 데는 더 큰 이유가 또 있다. 20세기의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은 그 발생동기와, 발생목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은 둘 다 발생동기가 제1,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 있었고, 발생목적 역시 둘 다 인류와 문명을 핵전쟁(nuclear war)에서 구하는데 있었다. 이처럼 20세기의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은 그 발생동기와 발생목적이 동일하기 때문에, 현대신학 해설에는 현대철학의 주제나, 용어들이 섞인다. 그러므로 20세기의 현대신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현대철학의 동기, 목적, 방법 등을 이해해야 한다.

  20세기의 현대신학은 이해하는 것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책을 쓰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기적을 불신하여 배격하면서도, 기적을 믿는 독자들 때문에 정통신학의 용어만을 사용하여, 기적의 불신을 은폐하고 신학을 해설하자니, 그 고충이 오죽하겠는가! 그러므로 칼 바르트의 경우를 보면, 그가 단순한 신학용어 하나를 해설할 때에도, 기적을 믿지 않는 자신을 덮어 은폐해야하기 때문에, 정통신학을 노골적으로 부정하거나 공격할 수가 없으므로, 은근하게 긍정과 부정을 여러 번 반복하되, 이것까지도 간접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지면을 몇 페이지씩 사용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칼 바르트가 무엇을 말하는지 핵심을 잡기가 어렵고, 맥을 노치기 일쑤다. 오죽했으면 바르트의 독일어판 「교회교의학」이 31권에 9,000 페이지나 되었을까! 바르트의 글은 읽다가 밀림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9,000페이지를 요약한 사도신경 강해서인 바르트교의학 개요(Dogmatik im Grundriss, Dogmatics in Outline) 15 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바르트 신학 이해의 첩경이다. 물론 고난도의 문장술과 해석학으로 짜인 글을 이해하는 것은 독자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뜻을 정하고, 바르트신학 연구에 46년(1956-2002)을 바치고서야, 겨우 책 한 권 16 을 출간할 수가 있었다. 46년간의 연구에서 최후의 분석은 geschichte와 sage에 대한 것이었고, 확실해진 것은, 바르트가 내세와 영생(二元論)을 불신한다는 사실이었다.


            Note

1. 김세윤,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국 맨체스터(Manchester)대학교의 F.F. Bruce 문하에서(Ph.D.),
    독일 튜빙겐(Tobingen)대학교 humboldt 연구교수, 미국 칼빈(Calvin)대학 교수, 서울 아세아연합신학대학 교수,
    서울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현재 Fuller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2.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두란노서원, 2001
3. 그림언어(metaphor)는 은유이고, 은유는 비유이다. 비유에는 직유와 은유가 있다.
4. 한종희,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신학"에 자세한 해설이 있음, 총회출판(예장합동), 2002
5. Karl Barth, Letters, pp.7-8, 342, translated by G. W. Bromiley, Eerdmans, 1981
6. 김세윤, 복음이란 무엇인가?, pp.151-163, 2006
7. 같은 책, p.155
8. 같은 책, p.154-155
9. 같은 책, p.156
10. 같은 책, p.162
11. 김의환, 현대신학 해설, 개혁주의 신행협회, p.117, 1989
12. Karl Barth, Church Dogmatic, III/4, p.569
13. Ibid., p.570
14. B. Russell's philosophy, Britanica Encyclopedia
15. Karl Barth, Dogmatik im Grundriss, 바르트 교의학 개요, 전경연 번역, 성문학사, 1957
16. 한종희,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신학, 총회출판(합동),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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