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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윤의 신학   < 그리스도의 신성과 내세가 없는 기독교 >       한종희 목사


1. 서     론

김세윤 교수의 신학은 계몽사상을 수용하고, 성서를 인간의 문서로 전제하고, 신학을 구성하기 때문에, 성경은 참고로 그치고, 인간이 신학을 구성한다. 김 교수의 신학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내세와, 영생을 믿지 않는 신복음주의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 교수를 그리스도의 신성과, 내세와, 영생을 믿는 보수주의 신학자로 알고 있으므로, 김세윤 교수의 정체를 밝히고자 필자가 이 글을 준비하였다. 김세윤 교수가, 2002년 5월에, 합동측 예장총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부산 수영로교회) 강사로서 선포하였던 신학강연문을 정통신학과 비교하여, 비평하려고 한다. 독자들은 강연문에서, 먼저 무엇이 문제점인지를 숙지해야 할 것이다. 강연문 중에 진하게 표한 부분은, 필자가 중요하다고 보아 표한 것이다. 먼저 강연문 전부를 다 적고, 강연문을 7 부분으로 나누어 해설하고, 비판하려 한다. 다음 강연문은 기자가 쓴 것이 아니고, 김 교수 자신이 작성한 문장이다.


2. 김세윤 교수의 강연문

 아래는 "기독신문"(2002.5.10)에 게재되었던 김교수의 강연문 원고이다


문제들 (막1:15,16)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보수교회(保守敎會)가 처한 이 시대의 문제들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개혁교회의 후손들인 우리가 어떻게 세대주의적이고 귀신론적인 신학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는가? 알레고리적 해석, 자기 멋대로 식의 성경이해,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성경에 대한 무지의 모습이 현재 보수교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보수교회가 지양해야 할 것 중에 일부의 교리로 성경을 조합하려는 위험한 시도가 있다. 교리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교리에 꿰맞추려는 위험한 형태들로 인해 왜곡된 성경해석이 이루어지고 마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고 많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했다"는 내용과 같은 형법적 해석범주로만 선포하다보면, 현재의 나 자신의 판단과 생각은 없어져 버리는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면, 과연 구원의 현재성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생겨지게 되고, 현재 속의 윤리는 없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적 이원론, 영혼과 육신을 이원화하려는 헬라적 해석: 내 영혼이 내세에 안락을 누린다.” 에만 만족하는 개념도 왜곡된 형태의 복음의 모습이다.
      오직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고 바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에만 신경 써야지, 인권이 뭐고 정치가 뭐냐? 우리는 오로지 전도해서 구원사업만 해야 한다.”는 논란으로 얼마나 많은 보수의 대립이 있었는가? 이것은 정말 쓸데없고 그릇된 논쟁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하려 하지 않고, 성경을 단편적이고 부분적으로 보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보수교회일수록 성경의 메시지가 온전히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복론이다. 번영신학. 돈을 신으로 섬기는 모습. 예수님 잘 믿으면 인류대가이고, 아파트 산다는 식의 급속한 미신화. 도리어 목회자들이 설교를 통해 이를 권장하고 조장하는 풍토는 그릇된 성경해석이 주는 부작용 중의 하나이다.
      공의와 정의가 확대돼 인권이 신장되고 성령은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은혜를 계시되게 해서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9개의 열매(도덕적인 것)를 맺게 하신다. 신학을 급속히 미신화 시키므로, 신비스럽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각 세대가 새롭게 적용하고 정립할 이 시대의 신학을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윤리적인 부재가 온다. 복음이 우리 삶 전체에서 요구하는 윤리적인 부분을 생각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온전한 복음 선포가 절실하다. 중요한 것은 혼신을 다한 하나님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전해야 한다. 이것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에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술, 담배의 문제도 먹으면 죄고 죽는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점에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주일 성수개념도 주일에 음식을 사먹었느냐 안 사먹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주께서 주실 양식으로 살겠습니다.”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적극적인 제자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진정한 주일성수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율법적으로 자꾸만 하나님과 따지려들고 계산하려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에 버스를 타야하나 말아야 하나? 버스는 되도 택시는 안 됩니까”라는 식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을 따르고 있는 셈이 된다.
      우리 신자들의 삶은 모든 곳에서 “샬롬”(구원의 현재성)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근래의 개신교는 다시 중세 가톨릭으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인구의 1/4이 주일에 교회에 가는 나라는 우리 한국밖에 없다. 성경권위의 강조는 한국 개신교의 좋은 전통이다. 그러나 어느새 사제주의와 권위주의가 만연돼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쯤으로 여기는 모습이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던 이들의 후예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원  인 (고전10:25-11: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1-32)

      중세교회의 현실이 다시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스콜라방법을 배격하고 오직 성령에 의한 개혁, ‘Sola Scriptura!'(오직 성경)를 추구했다. 그러나 한 두 세대가 지나면서 교리에 성경을 맞춰 넣으려는 스콜라철학 식으로 다시 변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자꾸 숫자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교단에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3위 일체론은 초월과 현실 속에서의 내재개념으로 봐야한다.
      요즘 총신 교수들이 연구를 못하겠다고 한다. 뭐 좀 하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말로 공격을 해대서 발표는커녕, 아예 연구조차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총신의 신학은 발전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개혁주의를 한다는 이들이 가톨릭적인 신학을 자꾸만 하려고 든다. 그리스도의 은혜론, 삼위일체, 강림 하나님, 내주 하나님, 타종교와 매우 크게 다른 이 훌륭한 점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신학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신학의 갱신이 없으면 미래는 없다. 형식적인 성경권위만 얘기하니까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정서는 거의 복음주의적 조직신학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스콜라철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라도 ‘오직 성경’을 재확립하고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한민족에게 닥친 가장 큰 숙명적 문제가 무엇인가? 화해가 아닐까? 바울은 엡1,2장 이방사역을 되돌아보면서 ‘화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복음을 오늘날의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맞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모습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하나님 절대주의는 표어로만 그치고 있다. 신학의 화석화(化石化)에 머무르려는 모습이 다분하다. 신학자들에게 역사비평의 허용성을 제공해야 한다.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달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마태, 마가, 요한이 추구하는 복음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상황화된 복음을 가장 효과있게 전달하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요한복음은 헬라인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지 않은가?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적용해 이방인들에게 전했는가? 이혼문제, 제사음식 등 쉽지 않은 문제를 그는 어떻게 다루었는가? 제사음식의 경우, ‘우상숭배는 안 된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제사지낸 것인가 아닌가 묻지 말고 그냥 먹고, 먼저 얘기해 주면 이웃을 위하는 관점에서 먹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복음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복음이 회복되고 성경이 더 이상 스콜라적인 해석에 묶이지 않도록 바람직한 해석학에 의한 포괄적인 성경해석과 연구, 그 신학화와 정립화가 절실하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 교단의 미래가 있고 한국 교회의 미래가 있다.




3. 해설과 비판
         "기독신문(2002.5.10)"에 게재된 김교수의 친필 강연문을 7개 항목으로 나누어 해설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1)  왜곡된 신학과 바른 신학
2)  윤리신학은 제자도를 뜻한다
3)  인권신장이 온전한 복음이라고 하였다
4)  윤리신학은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간다
5)  김 교수는 왜 화두를 중세교회로 돌렸는가?
6)  김 교수는 신학갱신을 주장하였다
7)  신학갱신을 위하여, 역사비평을 허용하라고 하였다

김 교수가 신학강연에서 주제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보수교회에 대한 3 가지 지적은 옳은 지적이고, 보수교회가 수용해야 한다고 보아, 그 3 가지를 먼저 말하고자 한다.

첫째, 보수교회의 목사들에게 사제주의와 권위주의가 만연하여,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쯤으로 여긴다는 지적이다. 권위주의가 왜 죄가 되는가? 목사와 총회장의 직책은, 일하게 하는 책임을 말하지만, 권위주의는 명예와 영광을 지칭한다. 총회장 선거에 수억 원을 사용케 했던 동력은 명예와 영광이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영광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독점물이고, 목사는 종이기 때문에, 충성 후에 영광이 주어져도, 거절하고 무익한 종으로 머물러야 한다(눅17:10).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할 영광을 헤롯왕에게 돌릴 때에, 거절치 않고 받다가, 충이 먹어 죽었다(행12:23).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종 된 목사에게 명하신 것은, 생활력이 없는 노약자와, 고아와, 과부와, 병약자를 돌보라는 것인데, 이들은 외면하고, 수억 원을 명예와 영광에 소비하고, 또한 주님의 뜻을 행하라고 교인들에게는 가르치면서, 자신은 딴전을 폈으니, 주님은 어떻게 나오시겠는가? 또한 “있을지어다”로 끝맺는 축도가 하나님을 대신한 축복권이라는 생각이, 목사에 따라서는 권위주의에 부채질해 왔다. 그러나 “있을지어다”는 명령사가 아니고, 옛적 언어로서 “소원표시”이다. 축도는 목사가 명하여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올라가는 청원이다. 성경에 의하면, 영광은 결실로서 주인의 차지이고, 목사는 일터에 보내진 종이며, 무익한 종으로 머물러야 한다(눅17:10).

둘째, 김 교수가 보수교회의 복론을 강력히 비평하였는데, 그 이유는 ① 김 교수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지옥형벌을 불신하였듯이, 하나님의 축복 권을 불신하였기 때문이다. ② 김 교수가 보수교회의 복론을 강력하게 비평하는 이유가 또 있다. 5천 년 묵은 샤머니즘 때문에, 교회 안에 종종 발생하는 병폐 때문이다. ③ 또한 한국의 보수교회는 교인증가와 재정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복론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죄악이 횡행해도, 하나님의 징계는 말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만을 설교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성서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에게 벌주시고, 순종하는 자에게 복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무조건 복 주시지 않고, 복 받을 짓을 해야 복 주시며, 죄 범하면 도리어 벌주시고 징계하시는데, 보수교회가 형벌과 징계는 설교하지 않고, 축복만을 외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윤리타락을 믿음타락으로 간주하셔서, 윤리타락을 항상 심판하셨다. 왜냐하면, 믿음과 윤리(순종)는 분리가 불가능하고, 반듯이 함께 있고, 함께 가기 때문이다.(약2:20,26)

셋째, 김 교수가 보수교회의 윤리저하를 개탄하였다. 보수교회의 윤리저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두드러진 이유는, 무수한 교단과, 무수한 신학교와, 무수한 신학생들과, 무수한 목사들이 무한 경쟁에 빠져서, 교회를 못자리판처럼 세우면서부터, 교인이 교회의 재산목록이 되었고, 영혼구원이 아니라, 교회의 성장이 첫 목표가 되어진지 오래되었다. 이웃 교인이나 목사가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 내지는 적으로 변한 경우가 허다하고, 교회가 사업장으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성장이 하나님이 되었고, 당회와 목사와 교인들이 범하는 죄에 성장이 면죄부를 주어왔다. 교회운영에서 모든 기준과, 목표와,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뜻)에 있지 않고, 성장에 있다. 성장을 위한 것이면, 모든 것이 OK이고, 성장을 저해하면 죄가 되어진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하나님이 명하시는 바를 다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목사가 범죄를 책망하지 않으니, 나환자처럼 죄의 감각이 없어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목사가 선을 행하라고 설교하면서, 자신은 고아와 노약자와 병약자와 실직자들을 외면하고, 수억 원으로 총회장 직을 사려하니, 죄의 감각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으니,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순종하지 아니함은 하나님을 외면하여 떠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불순종을 심판하셨다. 주님이 지금 오시면, 한국 교회를 어떻게 말씀하실까? 장터로 책망하실 것이다. 한국교회는 회개하여 돌아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심판과 멸망이 찾아들 것이다. 누가 말했든, 옳은 말이면 수용해야 한다. 눈 있는 자는 자연과 사건만을 보고도 교훈을 받는다.

1)  왜곡된 신학과 바른 신학

      해  설

먼저 "왜곡된 신학과, 바른 신학"에 대한 김 교수의 주장을 읽어보자.


      보수교회(保守敎會)가 처한 이 시대의 문제들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개혁교회의 후손들인 우리가 어떻게 세대주의적이고 귀신론적인 신학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는가? 알레고리적 해석, 자기 멋대로 식의 성경이해,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성경에 대한 무지의 모습이 현재 보수교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보수교회가 지양해야 할 것 중에 일부의 교리로 성경을 조합하려는 위험한 시도가 있다. 교리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교리에 꿰맞추려는 위험한 형태들로 인해 왜곡된 성경해석이 이루어지고 마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고 많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했다"는 내용과 같은 형법적 해석범주로만 선포하다보면, 현재의 나 자신의 판단과 생각은 없어져 버리는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면, 과연 구원의 현재성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생겨지게 되고, 현재 속의 윤리는 없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적 이원론, 영혼과 육신을 이원화하려는 헬라적 해석: 내 영혼이 내세에 안락을 누린다.” 에만 만족하는 개념도 왜곡된 형태의 복음의 모습이다.
      오직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고 바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에만 신경 써야지, 인권이 뭐고 정치가 뭐냐? 우리는 오로지 전도해서 구원사업만 해야 한다.”는 논란으로 얼마나 많은 보수의 대립이 있었는가? 이것은 정말 쓸데없고 그릇된 논쟁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하려 하지 않고, 성경을 단편적이고 부분적으로 보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보수교회일수록 성경의 메시지가 온전히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복론이다. 번영신학. 돈을 신으로 섬기는 모습. 예수님 잘 믿으면 인류대가이고, 아파트 산다는 식의 급속한 미신화. 도리어 목회자들이 설교를 통해 이를 권장하고 조장하는 풍토는 그릇된 성경해석이 주는 부작용 중의 하나이다.
      공의와 정의가 확대돼 인권이 신장되고 성령은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은혜를 계시되게 해서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9개의 열매(도덕적인 것)를 맺게 하신다. 신학을 급속히 미신화 시키므로, 신비스럽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각 세대가 새롭게 적용하고 정립할 이 시대의 신학을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윤리적인 부재가 온다. 복음이 우리 삶 전체에서 요구하는 윤리적인 부분을 생각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1)  김교수가 인용문에서 주장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 한국의 보수교회가 성경에 무지하고,
b. 한국의 보수교회가 귀신론적인 신학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c. 한국의 보수교회가 복음을 왜곡하여, 신학을 미신화 하고, 신비스럽게 만들어서,
d.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김 교수가 말한 보수교회는, 한국의 모든 보수교회들을 총칭한 말이므로, 김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던 합동교단의 전국 목사장로들과, 총신대학의 교수들을 향하여 한 말이다. 즉 합동교단과 총신대학이 성경에 무지하여 복음을 왜곡하고, 신학을 미신화하고, 신학을 귀신론적인 신학이 되게 하며,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 교수가 주장한 보수교회(합동교단과 총신대학)의 왜곡된 복음은 어떤 복음인가? 김 교수는 보수교회의 왜곡된 복음을 두 가지로 해설하였다.
첫째로, 복음을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했다”는 것으로 해설하여, 복음을 형법적 해석범주로 선포함으로서, 복음을 왜곡한다고 하였다.
둘째로, 복음을 유대교적인 이원론적 우주관과, 헬라적인 이원론적 인간관과, 현세와 내세의 이원론적인 구원관으로 왜곡하여, 복음을 미신화하고, 귀신론적인 신학이 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김 교수가, 보수교회(합동교단과 총신대학)가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보수교회가 복음을 왜곡하여, 이원론적인 우주관과, 이원론적인 인간관과, 이원론적인 구원관을 주장하고, 둘째 복음을 형법적으로 해설하여, 지옥과 천국과 영생을 말하니, 현재의 윤리가 살아나지 않고, 현재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김 교수가 말하는 현재의 윤리현재의 구원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서가 말하는 9 가지 사랑의 열매가 현재의 윤리이고, 이 9 가지 열매가, 기독교가 지향해 나가야 할 현재의 구원이라고 하였다. 김 교수가 이것을(현재의 윤리, 현재의 구원) 달리 표현하여, 이것이 곧 정의실현이고, 인권신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주장하는 구원에는 내세(來世)가 없다. 김 교수가 저술한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도, 현재의 윤리만이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2) 보수교회(합동교단과 총신대학)가, 십자가의 죽음을 형법적으로 해석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지옥 형벌에서 해방 받아, 천국에서 영생하는 복음이, 이것을 믿지 않는 김 교수에게는 왜곡된 복음이었고, 미신화한 신학이었으며, 귀신론적인 신학이었다. 그러므로 김 교수는, 보수교회가 왜곡된 복음과, 귀신론적인 신학으로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몰아간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 교수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보수신학이 미신화한 신학이고, 귀신론적인 신학 이라고 하였다.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김 교수에게는, 이원론적인 우주관이 미신이고, 귀신론적이다.
② 인간의 영혼을 믿지 않는 김 교수에게는, 이원론적인 인간관이 미신이고, 귀신론적이다.
③ 내세의 영생을 믿지 않는 김 교수에게는 이원론적인 구원관이 미신이고, 귀신론적이다.


      평  가

(1) 그러나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을 지옥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영생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간곡하신 요청에 순종하지 아니할 수 없음으로, 정통신학의 하나님은 능히 인간의 3대 욕망(물욕, 정욕, 명예욕)에 재갈을 물려 억제하며, 율법과 계명에 순종하게 하여, 현재의 윤리를 살려낸다. 그러나 김세윤 교수는 지옥형벌과 영생을 불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원받은 감격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율법과 계명에 복종할 리가 없으므로, 9 가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또한 현대철학(생의 철학, 실존주의 철학, 분석철학)이 역시 윤리회복을 꾀하여 궐기하였지만, 그것들에는 두려우신 하나님이 없고, 인간의 3대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랑의 9 가지 열매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현대신학과 현대철학이 그 얼마나 간곡히 인간의 실존과 인간의 윤리회복을 외쳤던가?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1970년대 이후로, 한국교회가 Billy Graham이 외쳤던 신복음주의 복음으로 교회마다 성시를 이루어왔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해왔지만, 교회는 타락했으며, 국회는 쇠망치가 난무한다. ① 목사들의 관심이,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고아와 노약자와 병자들에게서는 떠났고, 자기 이름(총회장)을 위해서는 수억 원도 아깝지 않는 풍조가 지배적이다. ② 목사들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율법(뜻)을 지키라”고 선포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오직 성장을 위해서 헌신과 충성을 선포해왔고 목사들은 그 결실을 누려왔으며, ③ 헌신과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축복만을 외치고, 율법과 계명을 거역한 범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책망하지 않았다. ④ 교회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교회성장을 위한 사업장으로 변질하였고, 교인들은 그 결실을 누리고 있다. ⑤ 결국 교인들은 성장과 헌신과 충성이 곧 믿음이고, 이 믿음(성장, 헌신, 충성)이 구원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이것이 다 신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복음 선포에서,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랑만을 설교한 결과이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심판과 형벌을 배제하고, 오직 사랑과 자비와 구원만을 외쳐온 신복음주의 신학은 반쪽 신을 섬겨왔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배제하고, 사랑만을 강조하는 반쪽 신이 칼 바르트의 神(god)이고, Billy Graham 목사의 神(god)이고, 본서에서 필자가 지적한 신복음주의 신학자들(John Stott, James I. Packer, Harold Ockenga, Carl Henry, Edward Carnell)의 神(god)이다. 바로 이 반쪽 신을 섬기는 신학이 20세기를 지배한 신정통주의 신학신복음주의 신학이고, 21세기를 지배할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다.   Billy Graham 목사와 반쪽 神(god).Billy Graham 목사가 복음 선포에서,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배제하였고, 사랑과 구원만을 선포하였다. ② Billy Graham 목사가 설교에서, 재림과 부활과 영생을 배제하였고, 오직 현세(現世)의 구원만을 설교하였다. ③ Billy Graham 목사의 자서전에 의하면 1,  19세때 Bob Jones 대학의 근본주의(정통신학)가 싫어서, 에큐메니칼 신학을 가르치던 Florida Bible College로 전학하였다. ④ Billy Graham 목사가 1965년에 발표한 불타는 세계(World Aflame)에서 언급한 종말관에 의하면, 기독교의 종말을 재림, 심판, 내세에 두지 않고, 지상천국에 두었으니 2,  기독교의 종말관에서 내세를 배격한 것이다. 3   ⑤ Billy Graham 목사는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지 않고, 인간의 문서로 취급하였다. 그는 Newsweek 잡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밝혔다. 4

그러나 공의와 심판은 없고 사랑만 있으며, 내세와 영생은 없고 현세만 있는 반쪽 神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이다. 지금은 한국과 영국과 미국의 어느 신학교나 교단이든, Billy Graham 목사와, Billy Graham 목사가 이끌던 신복음주의 신학이 지배하는 곳에는, 성서의 하나님은 없다. 교회들과 목사들은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교단과, 교단신학교를 보라. B. Graham 목사가 1997년에 불교와, 힌두교와, 무스림의 구원이 기독교의 구원과 동일하다는 종교 다원주의 신학을 선포하여 5,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대속(atonement)을 완전히 삭제하였으니, Billy Graham 목사와 신복음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다원주의로 가닥이 잡혔다. 다원주의 생활양식은 종교에서 끝나지 않고, 세계의 경제와 사회구조를 지배할 것이다. 따라서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은, 지나가는 기차에 짖어대는 개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2) 김세윤 교수의 신학 평가에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대목은, “미신과, 신비와, 귀신”에 대한 김세윤 교수의 언급이다. 현대신학에서는 미신과, 신비와, 귀신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뜻하며, 특히 귀신은 도깨비와 동일한 뜻이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총신의 신학을 미신과, 신비와, 귀신의 신학으로 평가한 것은, 총신이 믿는 신이 도깨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도깨비 신을 믿는 총신대학이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김 교수는 성서에 있는 하나님의 출현을 귀신이나, 도깨비의 출현 정도로 보았으며, 총신대학의 신학이 믿는 하나님을 귀신과 도깨비정도로 보았기 때문에, 총신대학과 합동교단이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할 수가 있었다. 김 교수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지 않고, 인간의 문서로 보았기 때문에, 김 교수가 성서에 있는 하나님의 출현과 활동을 미신과 신화(myth)로 보았음이 분명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교수가, 성서를 전설과 신화가 섞여 쓰인 설화(고대소설) 6,  소설(fiction)에 해당하는 은유(metaphor)라고 주장한 7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간창조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영혼과, 내세의 영생을 포함하는 이원론적인 우주관과, 이원론적인 인간관과, 이원론적인 구원관은 성경의 교훈이고, 사도신경의 교리이고, 기독교가 2천 년간 고백하여왔기 때문에, 이 세 교리를 배격하면, 기독교를 배격하는 배교신학이 되어진다. 김세윤 교수가 세 교리를 왜곡된 복음이라 하여, 기독교 신학에서 배제하였으니, 김세윤 교수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고, 배교신학이다.

(3) 그런데 본서(484쪽 분량의 책-편집자주)에서 필자가 해설한 신복음주의 신학자들 7인은 다 인간창조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영혼과, 내세의 영생을 믿지 않았다. 이러한 배교현상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미국장로교(PCUSA) 목사 1,274명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불신하여 배격하는 오번선서(Auburn Affirmation)에 서명한 해가 1923년이었고, Princeton 신학교 교수였던 G. Machen이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발표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던 당시의 목사들의 불신앙을 폭로하였으나, 미국장로교(PCUSA) 총회는 Machen을 물리치고, 1926년에 오번선서(Auburn Affirmation)를 수용하여, 자유주의 쪽에 손을 들어주었으며, 1929년에는 Princeton 신학교도 오번선서를 수용하여, 자유주의 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미국장로교회(PCUSA)는 1929년을 끝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미국 연합감리교와 성공회에서는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결국 미국의 기독교는, 1920년대에 자유주의 신학이 대세를 장악하였다. 천주교 신학도 마찬가지다.

2009년 1월 1일, 한국 중앙일보에는, 신년 메시지로 한국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78세)의 글을 게재한 것이 있다. 그 내용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해설이었다. 지금은 세계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으니, 우리들 모두가 사랑을 실천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창출에 나서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에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당시 예수님 앞에 모였던 5천 군중이 예수님의 식사기도에 감복하여, 마음을 열고, 각자 품에 안고 있던 도시락을 꺼내 이웃과 함께 먹고, 남은 조각이 12 광주리가 된 것이니, 오늘 우리도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여 독식하지 말고, 가난한 이웃과 나누어 살자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주는 교훈이라고 하였다.

기자가 묻기를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답하기를, “한 개의 빵이 2개가 되고, 세 개가 된 기적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도 없습니다.”라고 하여, 오병이어 일화는 기적이 아니고,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강렬한 메시지이며, 한갓 일화일 뿐이라고 하였다.

정 추기경은 기적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기 위해서, Big Bang과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금년은 다윈(Charles Darwin)이 출생한지 200년이고, 종의 기원을 발표한지 150년인데, 우주는 Big Bang에 의해서 생겨났고, 고등생물(인간)은 진화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진화가 곧 창조라고 하였다. 1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생이 태어나고 죽는 과정이 영원한 법이고, 이 영원한 법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진화는 자연법에 속하고, 자연법은 영원한 법의 일부라고 하였다.

결국 정 추기경은,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지 않고, 빅뱅과 진화로 보았으니, 정 추기경의 신학에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없다. 따라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장대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성령수태나, 육체부활이나, 재림이나, 최후심판도 다 기적이 아니니, 이러한 기적의 일화는 신화일 수밖에 없다. 천주교회에서는 추기경의 지위는 절대적이므로, 정 추기경의 신학이 곧 천주교의 신학이다. 결국 21세기 현재, 개신교(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와 천주교종교 다원주의로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4) 김세윤 교수가 합동교단과 총신을 포함한 보수신학이 귀신론적인 신학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저주에 가까운 평이지만, 현대신학이 보수신학을 저주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대표적인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K. Barth(1886-68)는 보수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내세와, 영생의 교리를 복음으로 선포함으로, 복음을 미신화하고, 신비스럽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보아, 보수교회를 네 번이나 저주한 적이 있다. 8   짓지 못하는 개, 저주를 받을 자, 믿지 않는 불신자, 묘지에 처넣기 위해서 밀쳐진 자라고 하였다. John Stott도 보수신학을 암, 광신자, 마귀, 원수라고 하였다(본서 J. Stott신학 결론 참조).

Kierkegaard가 덴마크의 타락상을 고발하다가 정신환자 취급받으며 외쳤던 실존(existence)과, Socrates가 감옥에서 독살 당하면서까지 외쳤던 정의를 K. Barth가 성서로 해설하여, 윤리신학을 개발하였고, 바르트가 개발한 이 윤리신학이 20세기의 현대신학이 되었으므로, 보수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저주는, 현대신학 전체가 보수신학에 내리는 저주이기도 하다.

      신복음주의 신학은 윤리만을 주장하고, 기적은 배격한다

사도시대 이후 지금까지 보수신학은 하나님의 개념을 기적을 행하시는 초자연의 개념으로만 사용해 왔지만, K. Barth가 1919년에 로마서 강해서를 출간하고부터는, 모든 현대신학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개념에서 초자연의 개념은 배제하고, 오직 윤리의 개념으로만 사용해왔다. 물론 Barth 이전에도 Kant, Kierkegaard, Ritschtl 같은 석학들이 윤리를 무게 있게 다루었지만, 윤리가 기독교의 신학으로 역사에 화려하게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1920-1930년대에 당시 30대의 젊은 목사들(Barth, Bultmann, Brunner, Tillich, Nieburh 형제)의 공적이 크다. 이 30대의 젊은 목사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문명이 불타고,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인류와 문명을 전멸위기에서 보존하려는 동기에서 궐기하여, 초자연 개념의 하나님은 역사에서 완전히 밀어냈고, 오직 윤리 개념의 하나님만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신정통주의 신학이고, 신복음주의 신학이다. 신정통주의에서 칼 바르트의 역할은 기수로서의 역할이었다.

정통신학이 믿어온 초자연의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선한 일에 축복하시고, 명령을 내리시며, 명령을 거역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형벌하는 하나님이시지만, 20세기 현대신학(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이 가정하는 윤리개념의 하나님은, 전설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허구개념의 하나님으로서, 어떤 기적도 행하지 못하고, 기도에 응답하지 못하며, 악행에 형벌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망하는 것은, 스스로 행한 악행의 보응일 뿐이며, 신은 단지 가르치는 스승이고, 성서로서 인간에게 선악을 판별해주는 것뿐이다.

      20세기 현대신학이 말하는 신개념의 두 가지 특성

⑴ 20세기의 현대신학(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이 현대과학과 계몽사상을 수용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불신하지만, 윤리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윤리의 모범자로 신학해설에 등장시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 되었다. 즉 20세기의 현대신학은 하나님의 실재(reality)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지만, 윤리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 그리스도를 윤리의 모범 케이스로 등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현대신학은 다른 모든 기적의 용어들(천사, 마귀, 부활, 영생 등)도 허구개념의 용어로 보지만, 상징이나 비유로 해석하여 필요에 따라서 신학해설에 적용한다.

⑵ 20세기의 현대신학(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에서, 그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의 허구개념은 동일하지만, 그 신의 허구개념을 해석해내는 신학용어들은 신학자마다 다르다.

① R. Bultmann은, 신화(mythe)에서 신의 허구개념을 이끌어냈다.
② K. Barth는, 설화(geschichte)에서 신의 허구개념을 이끌어냈다.
③ S. Kierkegaard는 역설(paradox)에서 신의 허구개념을 이끌어냈다.
④ J. I. Packer는, 신비(mystery)와 소설(fiction)에서 신의 허구개념을 이끌어냈다.
⑤ 김세윤 교수는 은유비유(metaphor)에서 신의 허구개념을 이끌어냈다.
⑥ Billy Graham 목사도 신비(mystery)에서 신의 허구개념을 이끌어냈다.(불타는 세계 178쪽)

20세기의 현대신학(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이 사용하는 모든 초자연의 용어들(하나님의 만물창조, 그리스도의 성령수태, 육체부활, 재림, 영생 등)은 실체(reality)가 없는 허구개념이고, 비유 혹은 상징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상징이나 비유로 해석해야 하고, 절대로 초자연개념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초자연개념으로 수용하면, 상징이나 비유로 말한 것이 기적과 역사가 되어지고, 정통신학이 되어지기 때문에, 진보신학을 보수신학으로 보는 곡해에 빠지고 만다.

보수교회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이 부분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걸림돌이 되어 골치를 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현대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이 장애물이 보호색이 되어, 보수교회 안에서 평안히 지내며 활동하게 하여준다. 이 얼마나 기막힌 사실인가! 보수교회는 이 사실을 숙지하고, 배교한 신학의 침투를 막고, 보수신학을 지켜야 한다.


      Note

1. Billy Graham의 자서전, Just I am, pp. 40-41, Harper Collins Zondervan, 1997
2. Billy Graham, World Aflame(불타는 세계), 번역출판, 생명의 말씀사, 1968
3. Ibid., pp. 163-222
4. Newsweek, Aug. 14, 2006, "Billy Graham in Twilight; www.newsweek.msnbc.com
5. www.outsidethecamp.org/heterodoxy52.htm, 한종희,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 Billy Graham
6. 전설과 신화가 섞인 고대소설은 독일신학에서는 설화(geschichte)로 표현하지만, 영.미 신학에서는 마땅한 용어가 없어서 부득이
     story나 narrative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영어권에 속한 현대신학이 성서의 기적을 stroy나 narrative로 표현했을 때에는, story와
     narrative에 반드시 전설과 신화가 포함되어야 하므로 일반 이야기역사로 번역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설화로 번역해야 한다.
7.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pp. 69-70, 74-75, 80-81, 두란노서원, 2001, 은유(비유)의 반대어는 직유(비유).
8. K. Barth, "Dogmatik im Grundriss", 1947. 전경연 번역, "바르트교의학 개요", pp. 48-49, 성문학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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