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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윤의 신학   < 그리스도의 신성과 내세가 없는 기독교 >       한종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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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리신학은 제자도를 뜻한다

다음 두 편의 글은 김 교수가 주장하는 윤리신학이 유교의 제자도와 동일함을 말해준다.


온전한 복음 선포가 절실하다. 중요한 것은 혼신을 다한 하나님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전해야 한다. 이것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에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술, 담배의 문제도 먹으면 죄고 죽는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점에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주일 성수개념도 주일에 음식을 사먹었느냐 안 사먹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주께서 주실 양식으로 살겠습니다.”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적극적인 제자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진정한 주일성수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본 강연문 안의 내용에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동참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됨됨이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된 그 영광의 형상을 점점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을 되찾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제자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p. 103, 두란노, 2001>


김 교수는,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 개념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하였다. 그러나 율법 개념과, 제자 개념은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율법 개념은 이 율법이 하나님의 율법임을 말하지만, 제자 개념은 그 교훈이 스승의 교훈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율법을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한 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스승의 교훈으로 지키자고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도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제자의 개념 즉 스승의 교훈으로 지키자고 하였으니, 김 교수의 신학에서는 교훈을 주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고, 스승이므로, 김 교수의 신학에는 스승만 있고, 하나님이 없다. 그러므로 김 교수는 율법을 스승의 교훈으로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으로는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물론 김 교수가 신학해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 것이 있지만, 은유비유로서 말한 것이다. 은유비유에서 말한 하나님은 허구개념의 하나님이고, 관념의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보수신학(정통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거역하면 하나님이 형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두려움으로 순종한다. 다시 말해서, 정통신학에서는 하나님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한 대속(atonement)과 칭의(justification)로, 값없이 구원받은 자는, 지옥형벌을 벗어난 구원에 감격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되, 순교하면서까지 지키기 때문에(창4:3-8; 계1:9; 6:9,11; 12:17; 14:12), 참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벗어나며, 성화를 입으며, 이웃을 사랑하여 화목한 삶을 산다. 기독교의 윤리는, 값없이 구원받은 자가 감격하여, 능히 맺히는 열매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진보신학)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리스도도 보통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율법도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교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 스승이 주는 교훈으로 받기 때문에, 김 교수가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키는 것을 꾸짖었고,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현대신학은 지옥과 천국을 불신하고, 대속과 칭의를 불신하기 때문에, 구원의 감격이 없으므로, 율법도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바로 이것이 현대신학이자, 신복음주의 신학이다.

김 교수는 현대신학을 따르기 때문에, 성서의 교훈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으로 지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꾸짖었다. 반대로 성서의 교훈을 제자도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예수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믿지 않고,9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행적됨됨이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으니,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자 Albrecht Ritschle이 부르짖은 윤리신학이고, Kierkegaard를 따라 인간의 윤리회복(실존회복)을 부르짖은 Barth의 윤리신학이고, Bultmann, Brunner, Tillich, Niebuhr 형제 등이 외친 윤리신학이고, 미국의 Harold J Ockenga, Edward J. Carnell, Carl F H Henry 등이 외친 윤리신학이고, 영국의 John R. W. Stott와 James I. Packer가 외친 윤리신학이다. 필자가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를 밝히는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이 이러한 내막을 밝히는데 있었다.


3)  인권신장이 온전한 복음이라고 하였다

김 교수가,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여 인권을 신장하는 것온전한 복음이라고 주장하였으니, 인권신장이 곧 기독교의 구원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신학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김 교수의 주장이다.


공의와 정의가 확대돼 인권이 신장되고 성령은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은혜를 계시되게 해서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9개의 열매(도덕적인 것)를 맺게 하신다. 신학을 급속히 미신화 시키므로, 신비스럽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각 세대가 새롭게 적용하고 정립할 이 시대의 신학을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윤리적인 부재가 온다. 복음이 우리 삶 전체에서 요구하는 윤리적인 부분을 생각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온전한 복음 선포가 절실하다. 중요한 것은 혼신을 다한 하나님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전해야 한다. 이것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에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술, 담배의 문제도 먹으면 죄고 죽는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점에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주일 성수개념도 주일에 음식을 사먹었느냐 안 사먹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주께서 주실 양식으로 살겠습니다.”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적극적인 제자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진정한 주일성수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율법적으로 자꾸만 하나님과 따지려들고 계산하려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에 버스를 타야하나 말아야 하나? 버스는 되도 택시는 안 됩니까”라는 식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을 따르고 있는 셈이 된다.


김 교수가 인용문에서 주장한 핵심은,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무엇이 온전한 복음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이 온전한 복음이라고 하였다. 결국 김 교수에게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여,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 온전한 복음이고, 기독교의 구원이고, 이 시대의 신학이다.

김 교수가 “신학을 급속히 미신화하고, 신비스럽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어떤 신학을 지목하여 말한 것인가? 인용문에서 말했듯이, 왜곡된 복음(이원론적 우주관, 이원론적 인간관, 이원론적 구원관)을 선포하는 보수신학과, 총신을 지목한 말이다. 김 교수에게는, 보수신학과 총신의 신학이, 신학을 미신화 하고, 신비스럽게 하여, 현대인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는, 왜곡된 복음이고, 왜곡된 신학이다.

김 교수가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폐기하고, 인권의 신장을 현대인의 복음과 신학으로 주장하였으니, 십자가 대속의 복음과 신학을, 인권 신장의 복음과 신학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 전환은 기독교의 전환이고, 이 전환한 기독교는 분명히 배교신학임을 면할 수가 없다.


4)  윤리신학은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간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원론적인 우주관과, 이원론적인 인간관과, 이원론적인 구원관을 기독교에서 배제하고 나면, 기독교의 우주관에는 하나님이 없어지고, 구원관에서는 내세가 없어지고, 인간관에서는 영혼이 없어지고, 그리스도도 신성이 없는 보통 인간이 되어진다. 따라서 신성 없는 예수로 구성되는 복음이나 구원이나 신학은, 윤리의 복음, 윤리의 구원, 윤리의 신학이 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통 인간 예수로 구성되는 복음과 구원과 신학을 다음과 같이 풀어낼 수박에 없다. 즉 보통 인간 예수가, 가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여, 정의와 공의를 세우고, 인권을 신장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를 스승으로 영접하고, 제자가 되어져, 예수님의 행적과 됨됨(품성)이에 동참하고, 예수님의 형상을 되찾으면, 인류사회는 지상천국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 김 교수와 신복음주의 신학자들(B. Graham, Ockenga, Henry, Carnell, Stott, Packer)이 주장하는 제자도의 윤리복음과 윤리구원과, 윤리신학이다. 이 제자도의 신학은 모든 20세기 현대신학이 주장해왔고, WCC와 NCC와 NAE가 지지해왔다.

20세기의 윤리신학의 대 전제가 그리스도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1950년대의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는 WCC, NCC, NAE가 대화 프로그램을 통하여, 종교통합을 시도해보았으나, 종교통합은 고사하고, 도리어 논쟁과 분쟁만을 조장함으로, 1990년대부터는 종교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동등하고, 그 구원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로마 법황이 제2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1965년에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고, John Stott 목사가 1992년에 책 “The Contemporary Christian”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고, Billy Graham 목사가 1997년에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다. 10

B. Graham 목사가 Robert Schuller 목사와의 TV 인터뷰에서(1997),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 성경을 전혀 모르고도, 사람들이 기독교의 구원과 동일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으며, 불교와 무슬림과 무종교인들(non-believing world)을 그리스도의 지체(body)에 포함시켰고, 선행(인권의 신장)을 기독교의 구원으로 선포하였으니, Billy Graham 목사가 50년간 전해온 복음은, 제자도의 가르침이었고, 선행이었음이 들어났다. 11

21세기는, 종교 다원주로 무장한 목사와 신학교와 교단들이 세계적인 기구들(WCC, NCC, NAE, RCC)을 이끌고 있다. WCC, NCC는 와전한 진보신학으로 잘 알려졌고, NAE는 필자가 본서의 저술로 충분히 밝혔고, 남은 것은 가톨릭(RCC)이다. 한국 가톨릭 신학을 대표하는 정진석 추기경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5천 명 군중이 가져왔던 음식을 나누어 먹은 것이고, 빵 하나가 두 개, 세 개 되어진 기적은 성경에는 없다고 하였으며, 우주는 빅뱅(Big Bang)에에서 시작되었고, 고등생물(사람)은 진화해서 나왔다고 하여, 우주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배격하였으니(한국 중앙일보, 2009년 1월 1일), 가톨릭교회가 종교 다원주의로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에서 SBS 방송이 2008년 7월 6일에 “신의 길, 인간의 길”을 방영한 사건이 한국 기독교계를 벌집 쑤셔놓은 격이 되었다. 방영내용은, 그리스도는 보통 인간이며, 십자가 사건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신문마다 글을 쓰거나 대담을 발표하였다. 특히 숭실대학교 기독교학 대학원장인 김영한 교수가 문제의 사건을 해설하여 쓴 글은, “이 시대 종교계의 흐름”을 말해주는 글이므로 소개한다.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단지 우리가 믿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슬람교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  <미국 San Francisco 소재, 기독일보 170호, 2008.7.10>

김영한 교수는 21세기의 기독교 신학종교 다원주의 신학으로 보았다. 김영한 교수가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함으로서 김영한 교수 자신의 신학도 종교 다원주의임을 밝혔다. 글의 요지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SBS의 보도사건을 종교 다원주의의 시각에서 풀어가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의 시각은 무엇이며, 그 척도는 무엇인가?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타종교에 대하여 우월감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 기독교만 구원받는다든가, 기독교만 진리라든가 하는 절대주의독선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대신학과 세계적인 기독교 기구들(WCC, NCC, NAE)이 대화를 추진했었다. 그러나 대화에서 서로 자신의 우월을 주장하기 때문에, 분쟁만 무성하였다. 그래서 종교통합은 접고, 모든 종교와 그 구원이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종교 다원주의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간(美蘇間)의 냉혹했던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모든 종교와 그 구원이 동등하다는 종교 다원주의만이 인류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라는 사상이 무럭무럭 자랐고, 제일 먼저 로마 가톨릭 법황이 제2 바티칸공의회를 끝내면서, 1965년에 종교 다원주의를 선포하였고(Gaudian et Spes, para, 22), 1974년 노잔대회의 노잔선언(Lausanne Affirmation)을 초안했던 John Stott가 1992년에 다원주의를 선포하였고, 12   Billy Graham이 종교 다원주의를 지지함으로서(1997), 13   종교 다원주의가 21세기의 신학으로 굳혀진 셈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추세에서,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교회와 신학교와 목사들과 교인들이 명심할 것은, 종교 다원주의의 적은, 절대주의유아론독선주의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의 유일성과, 기독교 진리의 유일성을 확신하는 합동교단과 총신대학과, 모든 보수교회들은 다 종교 다원주의의 적인 것이다. 지금은 조용하나, 다원주의가 세계적인 대세가 되어지는 날에는 절대주의는 설 땅이 없다. 이것이 참 교회의 최후다.

예수님이 누누이 종말을 예언하셨고, 사도들도 누누이 종말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모든 교회가 종말예언에 전혀 반응이 없다. 목사들도 종말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성장 번영 축복에만 몰입하고 있다. 그러나 종말예언에 무반응은, 타락을 의미한다. 모든 곡식은 추수가 목적이듯이, 교회도 종말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종말예언에 무반응한 것은 종말을 계획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반응이니, 분명히 타락이다. 보수교회여 깨어 일어나라.


5)  김 교수는 왜 화두를 중세교회로 돌렸는가?

김 교수는, 우리 가운데 중세교회의 현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보수교회가 중세의 가톨릭신학과, 스콜라 신학과, 스콜라철학과, 스콜라 방법을 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러나 김 교수의 강연을 듣던 총신 교수들과 합동 교단 목사들은, 김 교수가 연 달아 말한 중세교회 가톨릭신학과, 스콜라 신학과, 스콜라 철학과, 스콜라 방법 등이 누구를 지목하여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김 교수가 합동교단과 총신의 신학을 비평하는 것이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500년 이전의 스콜라 철학, 스콜라 신학, 스콜라 방법, 가톨릭 신학을 정신없이 열거하니, 청중이 그 내용을 즉석에서 분간할 수가 없어 조용히 지나갔다. 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총신 교수들이나 보수신학계에서 김 교수의 글을 문제 삼는 교수가 한 사람도 없었다. 만일 총신 교수들 중에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신학자가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김 교수가 총신의 신학을 문제 삼아, 합동교단의 목사 장로들 앞에서 강연하면서, 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500년 전의 중세교회를 끌어다가, 그것도 청중이 분간하기 어렵게, 정신없이 낯 선 신학용어들만을 열거하여 말했는가? 우리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필자의 비평을 대하기 전에, 먼저 김 교수의 강연내용을 진지하게 읽고 이해해야 한다. 다음은 문제의 내용이 들어있는 김 교수의 강연문이다.


중세교회의 현실이 다시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스콜라방법을 배격하고 오직 성령의 의한 개혁, ‘Sola Scriptura!'(오직 성경)를 추구했다. 그러나 한 두 세대가 지나면서 교리에 성경을 맞춰 넣으려는 스콜라철학 식으로 다시 변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자꾸 숫자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교단에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3위 일체론은 초월과 현실 속에서의 내재개념으로 봐야한다.

요즘 총신 교수들이 연구를 못하겠다고 한다. 뭐 좀 하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말로 공격을 해대서 발표는커녕, 아예 연구조차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총신의 신학은 발전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개혁주의를 한다는 이들이 가톨릭적인 신학을 자꾸만 하려고 든다. 그리스도의 은혜론, 삼위일체, 강림 하나님, 내주 하나님, 타종교와 매우 크게 다른 이 훌륭한 점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신학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신학의 갱신이 없으면 미래는 없다. 형식적인 성경권위만 얘기하니까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정서는 거의 복음주의적 조직신학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스콜라철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라도 ‘오직 성경’을 재확립하고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한민족에게 닥친 가장 큰 숙명적 문제가 무엇인가? 화해가 아닐까? 바울은 엡1,2장 이방사역을 되돌아보면서 ‘화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복음을 오늘날의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맞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모습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하나님 절대주의는 표어로만 그치고 있다. 신학의 화석화(化石化)에 머무르려는 모습이 다분하다. 신학자들에게 역사비평의 허용성을 제공해야 한다.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달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마태, 마가, 요한이 추구하는 복음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상황화된 복음을 가장 효과있게 전달하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요한복음은 헬라인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지 않은가?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적용해 이방인들에게 전했는가? 이혼문제, 제사음식 등 쉽지 않은 문제를 그는 어떻게 다루었는가? 제사음식의 경우, ‘우상숭배는 안 된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제사지낸 것인가 아닌가 묻지 말고 그냥 먹고, 먼저 얘기해 주면 이웃을 위하는 관점에서 먹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복음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a) 김 교수가 합동교단과 보수교회를 지목하여 비평하였지만, 500년 이전의 스콜라방법과, 스콜라철학과, 스콜라신학과, 가톨릭신학을 비평하는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강연을 듣던 3천 명의 목사장로들와, 교수들은 김 교수의 비평이 누구를 지목한 것인지 선뜻 알아챌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중세교회는 루터(1483-1546)와 칼빈(1509-1564)이 종교개혁을 하기 이전의 교회를 말하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는 500년 이전의 교회를 말한다. 500년 이전의 중세교회에서는, 가톨릭신학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납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중세교회에서는 스콜라방법과, 스콜라철학과, 스콜라 신학이 다 동일한 가톨릭신학을 의미하였으며, 명칭만 달랐다.

그러면 500년 전의 가톨릭신학은 어떤 신학인가? 앞에서 김 교수가 주장한대로 말하면, 중세신학은, 성경의 기적들을 문자대로 믿고, 이원론적 우주관과, 이원론적 인간관과, 이원론적 구원관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여, 신학을 미신화하고, 귀신론적인 신학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에 빠지게 했던 신학이다. 그런데 합동교단과 총신이 21세기를 맞고 있는 현재도 500년 전의 중세교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하여, 김 교수가 합동교단과 총신의 신학을 중세교회의 이름으로 비평하고 성토하고 매도한 것이다. 앞에서도 김 교수가 보수교회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합동교단과 총신대학을 비평하였기 때문에, 3천 명은 이 공격이 자신들을 지목한 사실임을 직감하지 못하고, 조용히 듣고 지나갔다. 만일 김 교수가 3천 명을 향하여, 직선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바로 당신들이 신학을 미신화하고, 귀신의 신학을 만들었다”고 공격했다면, 강의현장이 어찌 되었을까? “바로 당신들이 고집하는, 이원론적인 우주관과, 이원론적인 인간관과, 이원론적인 구원관이 미신적이고 귀신론적인 신학이고, 죽어버린 화석화한 신학”이라고 공격했다면, 강연 현장은 분명히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가 앞에서는 포괄적인 용어 “보수교회”를 사용하였고, 여기에서는 500년 이전의 중세교회로 화두를 돌려서, 폭발하는 감정과, 논쟁과, 소란을 잠재울 수가 있었고, 강의를 계속할 수가 있었다.

2002년 5월에 있었던 합동교단의 전국목사장로 기도회 강사로 김세윤 교수가 강연했던 사건을, 2008년 6,7월에 SBS가 방영한 “기독교 폄하 사건”으로, 기독교 신도 1만 여명이 SBS 건물 앞에 모여, 항의 기도회를 열고, “SBS 무너져라”를 외치며, 사옥 주변을 돌았던 사건에 비교해 볼만하다. 김세윤 교수의 강연내용은 알고 보면, SBS 방연 사건보다 더 강렬한 “기독교 폄하 사건”으로 기록에 남을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조용하다. 2004년도 같은 기도회 강사가 되어, 화요일 밤 설교를 맡았던 필자가, 기도회 회지에 “김세윤 교수 신학의 비평”을 게재했었으나, 지금까지도 전혀 반응이 없다. 이 침묵은, 몰라서든지 알고서든지, 어느 쪽이든 사건은 크다. 결코 침묵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b) 여기서 잠시 신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보수신학을 믿는 신자들과 신학생들을 상대하여, 설교하고, 책을 쓰고,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독일처럼 정부가 사례금을 지급하는 사회에서는, 목사나 신학자들이 보수신학을 부정하고도, 직을 유지하기가 쉽지만, 교회가 사례금을 지급하는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보수신학을 정면에서 공격하고는 직을 유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아무리 세상이 계몽사상과 진보신학 사상으로 변했을지라도, 미국과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교인들과 신학생들은 아직도 보수신학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이나 미국에서 신학활동을 펴는 신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보수신학을 정면에서 공격하지 못한다. 자신의 신학을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도 못한다. 정면에서 공격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바로 면직 당한다. 실제로 감리교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가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통합)를 외치다가 자기의 교단에서 면직 당했다.

이것은 역으로 보아도 같다. 현대신학이 지배하는 신학교가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함으로, G. Machen 교수가 1929년에 Princeton 신학교에서 밀려났고, H. Lindsell 14   교수가 보수신학자로서는 마지막으로 Fuller 신학교에서 1964년에 밀려났다. Gordon Clark도 그의 진보신학이 문제가 되어, 근본주의 일색이던 Wheaton College에서 1943년에 밀려나, Butler University로 옮기고, 여생을 여기서 보냈다(1902-1985). 15   물론 Wheaton College가 처음에는 근본주의 신학이 우세했었으나, 1950년대 이후로는 Billy Graham이 이끈 신복음주의 신학의 본부(Center for Neo-Evangelicalism)가 되었다. 16   그러므로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현대주의 신학자나 목사들이 살아남는 길은,

ⓐ 자신의 정체를 깊숙이 묻어 둔 채, 정통신학을 지지하든지, 혹은 침묵해야 한다.
ⓑ 비평할지라도, 간접적으로나 우회적으로 하여, 논쟁과 공격을 잠제우거나, 피해가야 한다.
ⓒ 자신의 정체성도 간접적으로나 우회적으로 주장함으로, 가려서 알아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김세윤 교수도 500년 이전의 중세기의 철학과 신학을 들먹여서, 총신대학 교수들과, 3천 명의 목사장로들의 공격과 소동을 잠재울 수가 있었다. 이 신학강연이 2002년에 있었으나, 지금까지 총신과 교단은 조용하기만 하다. 단지 대구동노회 김광길 목사(박윤선의 제자)가 문제를 발의하여, 동노회가 김 교수에게 서면으로 질문했으나, 답이 없었고, 총회 신학부에 질의하였으나, 더 이상 교단에 강사로 청하지 않는다는 행정적인 조치로 끝냈고, 신학은 거론하지 않았다. 왜 총회 신학부가 신학은 손대지 안했는가? 여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신학자의 강연이나 책은 반듯이 교회와 교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신학의 문제는 곧 교회의 문제요, 교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사회라는 공동체가 TV, 신문, 잡지와 같은 공기를 통하여 사회의 건전성과 순결성을 지켜가듯이, 교회도 신학에 문제가 발생하면, 교회가 반드시 살펴서, 공회 앞에 공지하여, 교리와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가야 하고, 계승해 가야 야 할 책무가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총신과 총회와 교단이 김세윤 교수의 신학에 대하여 침묵함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빨리 김세윤 교수의 신학을 문제로 제기하고 정답을 구하여 총회 앞에 공고할 책임이 있다. 우리와 반대되는 신학과 우리가 교제하고 대화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온 금기사항이다. 배교신학이나 이단과의 대화와 교제가 왜 금기사항인가? 배교신학이나 이단과의 대화와 교제는 반듯이 누룩으로 작용하여, 배교와 이단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정통신학을 견지한 신학생이 진보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3년 혹은 5년을 지내면, 거의가 다 성서를 비판하는 진보신학을 수용한 배교자들로 변하고 만다. 한신, 감신, 장신을 졸업한 학생들의 신학적인 성분을 보라.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보신학을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생들은 거의가 성경비평을 수용하고, 진보신학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배교신학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은 곧 배교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금기사항이었다.


6)  김 교수는 신학갱신을 주장하였다

신학갱신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고 하여, 신학갱신을 주장하였고, 그 방법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신학의 갱신이 없으면 미래는 없다. 형식적인 성경권위만 얘기하니까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정서는 거의 복음주의적 조직신학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스콜라철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라도 ‘오직 성경’을 재확립하고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 . . . . 우리 교단의 하나님 절대주의는 표어로만 그치고 있다. 신학의 화석화에 머무르려는 모습이 다분하다. 신학자들에게 역사비평을 제공해야 한다.


(a) 신학갱신의 방법

신학갱신의 방법에는 2 가지가 있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로 전제하고, 성서대로 신학을 갱신하는 보수신학이 있고, 성서를 인간의 문서로 전제하여, 성서를 비평하고, 인간이 신학을 갱신하는 진보신학이 있다. 보수신학은 사도들과 교부들이 시작하여 Augustine, Luther. Calvin을 거쳐서 현재에 이어졌지만, 진보신학은 불과 200년 전에 자유주의로 출발했으나, 현재는 세계를 덮는 큰 공동체를 이루어 현대신학이라 칭하고, 그 슬하에 WCC, NCC, NAE, BGAE(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RCC(Roman Catholic Church) 등을 거느려왔다. 김 교수의 방법은 진보신학의 방법이다. 인용문에서 이 부분만을 다시 적는다.


형식적인 성경권위만 얘기하니까 미래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 . . . 신학자들에게 역사비평을 제공해야 한다.


김 교수는 성경권위를 따르는 방법은 미래를 어둡게 함으로 취할 것이 못 되니, 버려서 마땅함으로, 역사비평의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권위의 방법은 보수신학의 방법이고, 역사비평의 방법은 현대신학의 방법이다. 성경권위성경무오가 더 적절한 표현이고, 역사비평고등비평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즉 성경무오와 고등비평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어, 200년간의 피나는 투쟁사(鬪爭史)를 남겼다. 보수신학과 현대신학의 투쟁은, 성서관의 투쟁이었으며, 보수신학의 완패와 현대신학의 완승으로 끝났다. 단적인 예를 말하면, Carl McIntire가 이끌었던 Faith 신학교가 1985년에 New Jersey 주정부 고등교육부로부터 학교인가취소를 당한 것과, McIntire가 이끌었던 ACCC, ICCC 운동의 쇠퇴가 말해준다. 그러나 진보신학인 Fuller 신학교는 2008학년도 학국학생만도 700명이라고 한다. 성경무오와 고등비평이 1910년대에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용어로 표현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로는 자유주의가 복음주의로 호칭되었으며, 1985년에 Faith 신학교가 인허취소를 당한 후로는, McIntire의 퇴장과 함께 근본주의는 역사에서 살아졌고, 복음주의로 호칭되는 자유주의만 남았다. 그러므로 1990년대 이후로는 이 자유주의가 곧 종교 다원주의를 낳았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구들(WCC, NCC, NAE, BGAE-Billy Graham의 전도단, RCC-천주교)이 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종교 다원주의에 말뚝을 박았다. McIntire와 근본주의의 퇴장과 함께, Billy Graham의 노령화로 BGAE도 역사무대에서 퇴장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기독교의 변질을 배교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배교현상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예언했던 대로 가는 것이다(마24:3-51; 계13:5-10; 계20:7-10). 성서는 배교의 완성이 인류역사의 끝이라고 하였으니(살후2:1-12), 인류역사의 끝이 가까이 온 것이다. 현대신학이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역사의 바퀴는 하나님이 굴리신다.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설계하여 창조하셨고, 운행하시고, 심판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거두어 드리신다.

(b) 신학갱신의 내용

진보신학이 고등비평으로 신학을 어떻게 갱신하자는 것인가? 먼저 인용문에서 이 부분을 다시 적는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정서는 거의 복음주의적 조직신학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스콜라철학을 지향하고 있는가?



김 교수가 자유주의 신학복음주의 신학(보수신학)을 비교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복음주의 신학(보수신학) 보다 더 복음적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신학(보수신학)이 스콜라 신학(이원론적인 우주관, 이원론적인 인간관, 이원론적 구원관)을 지향하여, 미신적이고, 귀신론적인 신학이 되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주의적인 교리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보수신학)은, 합동교단이나 총신처럼 500년 전의 스콜라신학의 교리(이원론적인 우주관, 이원론적인 인간관, 이원론적 구원관)에 기원을 두고 있으니,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500년 전의 스콜라신학의 교리를 따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21세기에 살면서, 500년 전의 스콜라신학의 교리를 고집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 교수가 인용문에서 신학을 갱신하되, “복음을 상황화하여, 이 시대의 신학을 세우자”고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음을 상황화하여, 현시대에 맞는 신학을 세우면, 성서는 단지 참고로 할뿐이고, 복음과 신학이 상황과 현시대를 따르기 때문에, 상황화한 복음이나, 시대를 따르는 신학은 기독교가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복음주의적인 교리”는 어떤 것인가? 김세윤 교수가 자유주의 신학이 지향하는 “복음주의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해설을 생략하였음으로, Harold John Ockenga 17  의 해설로 대신한다. Ockenga 목사가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의 투쟁에서, 근본주의 신학의 완패와 자유주의 신학의 완승을 선포하면서, 앞으로는 자유주의 신학이 제시한 복음주의적인 삶의 원리들을 교회가 수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다음은 그 핵심부분이다.


「 자유주의는, 영혼을 향한 열망과, 보다 낳은 세계를 위하여 투쟁할 수 있고, 보다 훌륭한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원리들을 기독교를 위하여 보유하고 있다. 신학자들이 자유주의가 원하는 세부적인 주장들을 다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이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받아드렸다. ⓐ 즉 성경은 다신교에서부터 발전하여 단일신교로 또 유일신교를 거쳐 윤리적인 유일신주의로 발전한 유대인의 종교적인 경험기록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감을 주셔서 기록한 계시가 아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독특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도덕적인 교사로서 그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 기독교는 예수님에 관한 종교가 아니고, 예수님의 종교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속죄와 부활은 단지 영원한 진리가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 기적은 하나의 전설이며, 고대인들이 한 인간을 높이 생각하려하여 입혔던 옷에 불과하다. ⓕ 복음은 효도정신을 의미하고, 형제우애를 의미하고, 사회적 이해와 향상을 의미한다. ⓖ 십자가는 하나의 헌신방법을 말하고, ⓗ 교회는 인간의 향상을 위한 조직체이며, 과학적인 사회주의 세계혁명을 목표하는 공산당과 대등한 조직체이다. 」


이것을 간추려, 일목요연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Ockenga가 모든 항목에서 초자연(기적)을 철저하게 제거하였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적인 경험 기록이다.
예수는 단지 도덕적인 교사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가 아니고, 예수가 믿었던 종교이다.
속죄와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고,
기적은 전설을 뜻하고,
복음은 효도정신과, 형제우애와 사회향상을 뜻하며,
십자가는 헌신의 방법을 말하고,
교회는 인간향상을 위한 기관이다.

Ockenga가 다음 3 가지 이유를 내세워,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를 따르자고 주장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는, 영혼을 향한 열정을 보유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는, 보다 낳은 세계를 위하여 투쟁하게 하는 원리들을 보유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는, 보다 훌륭한 삶을 살게 하는 원리들을 기독교를 위하여 보유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들은
ⓐ 영혼을 향한 열정이 있고,
ⓑ 보다 낳은 세계를 위하여 투쟁하게 하고,
ⓒ 보다 훌륭한 삶을 살게 하지만,

보수주의 신학의 교리들(이원론적인 우주관과, 인간관과, 구원관)은,
ⓐ 500년 전의 스콜라철학의 교리들이기 때문에,
ⓑ 현대에서는 화석처럼 굳어버린 교리들이고,
ⓒ 기적을 불신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미신적이고, 귀신적론인 도깨비신학이며,
ⓓ 미신적이고, 귀신적론인 도깨비신학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는 교리들이니,
ⓔ 폐기처분함이 마땅하고, 현대인에게 어울리는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로 갱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앞에서 열거한 모든 신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다 Ockenga가 열거한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로 신학을 구성해왔다. 필자가 본서에서 이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신정통주의 신학(1920-1950)은 상당히 알려져 있지만, 신복음주의 신학(1950-2000)의 정체(正體)는 거의 100% 은폐되어 있어,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신복음주의 신학의 正體가 왜 가려지고 은폐되어져 왔는가? 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독자들이 그 이유를 알아야, 비로소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正體)를 조금씩이나마 감지할 수가 있다. 다음은 그 이유들이다.

ⓐ 신복음주의 신학을 자타가 복음주의 신학, 개혁주의 신학, 보수주의 신학으로 호칭해왔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신학해설의 기법이나, 문장의 형식이 완전히 정통신학을 따랐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신학해설에서 용어들을 100%, 정통신학의 용어들만을 사용하였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정통신학을 절대로 정면에서 부정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자신의 신학적인 정체를 절대로 노골적으로 들어 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복음주의 신학이 완벽하게 가려지고 은폐되어져, 그 신학의 정체성이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신학자들은, 그들의 기적불신이 의심받지 않았다. Billy Graham, John R. W. Stott, J. I. Packer, E. Carnell, Carl F. H. Henry, H. J. Ockenga, 김세윤 등.


7)  신학갱신을 위하여 역사비평을 허용하라고 하였다

신학갱신을 위하여 총신 교수들에게 역사비평을 허용하라는 주장은, 김세윤 교수가 합동교단 전국목사장로 3,0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외친 주장이다. 화석화한(fossil) 총신의 신학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총신 교수들에게 역사비평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역사비평을 허용하지 않으면, 신학갱신이 불가능함으로, 화석화한 신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개탄하였다.


요즘 총신 교수들이 연구를 못하겠다고 한다. 뭐 좀 하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말로 공격을 해대서 발표는커녕, 아예 연구조차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총신의 신학은 발전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개혁주의를 한다는 이들이 가톨릭적인 신학을 자꾸만 하려고 든다. . . . . . 신학의 갱신이 없으면 미래는 없다. 형식적인 성경권위만 얘기하니까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정서는 거의 복음주의적 조직신학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스콜라철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라도 ‘오직 성경’을 재확립하고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

이와 같이 복음을 오늘날의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맞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모습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하나님 절대주의는 표어로만 그치고 있다. 신학의 화석화(化石化)에 머무르려는 모습이 다분하다. 신학자들에게 역사비평의 허용성을 제공해야 한다.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달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마태, 마가, 요한이 추구하는 복음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상황화된 복음을 가장 효과있게 전달하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 . . . . .



김세윤 교수가 인용문에서 주장한 핵심은 요약해서 말하면,

ⓐ 총신이 역사비평을 수용하여, 가톨릭적인 신학과 화석화한 신학을 버리고,
복음을 상황화하여, 이 시대의 신학을 세우자고 하였다.

총신이 고등비평을 수용하여, 복음을 상황화고, 이 시대의 신학을 세우고 나면, 기독교가 2천 년간 지켜온 이원론적인 우주관과, 이원론적인 인간관과, 이원론적인 구원관을 폐기해야 하고, 성서의 모든 기적들과 그리스도의 신성도 폐기해야 하고, 사도신경도 다시 써야 한다. 이렇게 되면, 보수신학(정통신학)은 살아지고, 허울만 남은 신과, 자연인(自然人) 예수와, 현세와 물질만 남는다. 형편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총신 교수들과 교단 지도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것인가!

김 교수는 “신학의 갱신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신학의 갱신을 강력히 호소하였지만, 그 내용에서는 보수신학(정통신학)의 페기를 주장하였고, 상황화한 복음으로 이 시대의 신학을 세우자고 호소하였으며, 상황화한 복음은 정의와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고, 이 인권신장이 기독교의 구원임을 주장하였다.

김세윤 교수가 기독교의 복음과 구원을 윤리회복과 인권신장으로 한정한 사건은, 김세윤 교수의 신학이, 정통신학에서 보면, 전통적인 기독교를 완전히 떠난 배교신학임을 말해준다.


      Note

9. 필자가 저술한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 (419쪽 분량)에 들어 있는 "김세윤 신학의 구원론"에서 김세윤 교수가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을 불신한 내용을 상술하고 있음.
10. www.outsidethecamp.org/heterodoxy52.htm, 필자가 저술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정체에서 상술함.
11. 한종희,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 중, "17. Billy Graham의 종교다원주의"를 참고 할 것.
12. John Stott, The Contemporary Christian, IVP, pp. 297-298, 1992
13. www.outsidethecamp.org/heterodoxy52.htm
14. Harold Lindsell, The Battle for the Bible을 참고할 것. (한역) 성경에 대한 논쟁, 정창영 번역
15. Encyclopedia of Evangelicalism by Randall Balmer, Gordon (Haddon) Clark, WJK, 2002
16. Ibid., Wheaton College, Wheaton, Illinois
17. Ockenga는 NAE 창설 및 초대회장(1942-1944), Fuller 신학 설립 및 3번 교장(1947-54, 1960-63), Christianity Today의 25년간
     이사장(1956-76) 및 편집장.   Boston Park Street Church를 은퇴한 후에는 Gordon Conwell Theological Seminary 교장
     (1970-79)을 역임하여 Billy Graham 목사와 쌍벽을 이룸.
18. Kenneth S. Kantzer, Evangelical Roots, pp.36-37, Fundamentalism by H. J. Ockenga, Thomas Nelson Inc. 1978. 생명의
     말씀사, 36-38쪽, 복음주의의 뿌리, 1978, 한종희,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 13, 신복음주의 신학 서론, (6) 신복음주의와
     H.J. Ocke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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