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진리와 함께   미션신조   양서번역   참고자료   말세적 현상   기독교 교리   은혜의 찬송곡     www.voamonline.com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           한종희 목사


        Page >>>   1 ,   2 ,   3


3. 바르트의 창조론


1)  바르트는 창시자(originator)로서의 신개념을 부정하였다

인간과 만물이 발생(發生)한 기원(紀元)을 신의 창조에 두느냐, 진화설이나 빅뱅설(Big Bang)에 두느냐에 따라서,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이 갈라진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을 말하여도, 하나님을 인간과 만물의 창시자(originator)로 믿지 아니하면, 무신론자가 되어진다. 기독교는 2,000년간 창세기 1, 2 장을, 천지만물의 기원(the origin)을 말해주는 역사문서(歷史文書)로 받아왔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천지와 만물의 창시자(originator)로 고백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창시자로서의 신개념을 거부하였다. 만일 바르트가 신개념을 창시자로 받아드렸다면, 바르트는 기독교를 믿은 신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다음 인용문을 읽어보자.


『 나는 하나님 아버지,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14   기독교적으로 이해된 이 창조의 신비가, 어떤 어리석은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계의 창시자(originator)라 할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15   창조를 세계의 존재원인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견지에서 보아, 전혀 무의미한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16 』


인용문에서 세 번째의 부분은 벨카워의 글이다. 바르트의 글에 벨카워의 글을 덧붙여도 무방한 것은, 인용한 벨카워의 책은 바르트를 잘 이해한 글로, 바르트 자신이 환영하였기 때문이다.17   실제로 두 사람의 글 내 용이 마치 한 손의 손등, 손바닥과 같아서, 글 뜻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 글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로는 믿으나, 하나님을 만물의 창시자로는 믿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만물의 창시자로 보는 것은, 도리어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였다. Berkouwer도 이 바르트의 견해를 동조하여 말하기를, 「창조를 세계의 존재원인으로 보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전혀 무의미한 짓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러한 글을 접하면서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즉 창조주와 만물창조는 한 사건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창조주를 믿으면 만물창조도 믿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르트는 이 두 용어를 전혀 별개의 뜻으로 하여, 창조주는 받아드렸으나 만물창조는 배격하였으니, 바르트의 글을 읽을 때에는 창조주와 만물창조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바르트는 창조를 세계의 존재원인으로 보거나, 하나님을 세계의 창시자로 보는 것은 바벨론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을 세계의 존재원인으로 보거나, 세계의 창시자로 보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을 세계의 존재원인으로 보거나, 세계의 창시자로 본다면, 창세기와 하나님을 바벨론 신화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를 어떻게 보자는 것인가? 다음에서 주장하기를, 창세기를 설화(고대소설)로 보고, 고대소설을 해석하여 교훈을 받자고 하였다.

2)  바르트는 창세기 1, 2 장은, 설화(고대소설)라고 주장하였다

바르트가 앞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시자(originator)임을 불신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창조기사를 어떻게 취급했을까?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설화 즉 고대소설이라고 주장하였다.


『 창조 자체는 신화로 얻어지지 아니하므로 창조신화라는 것은 없다. 예를 들면, 바벨론 창조신화에서는 이 사정이 밝히 나타나 있다. 바벨론 신화에서는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에 관한 신화를 취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을 창세기 1, 2 장은 전연 문제 삼지 않고 있다. 바벨론 신화에서는 신화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할 수가 있지만, 성서에는 신화에 비할만한 것이 전혀 취급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성서의 설화(geschichte)에다가 이름을 주어 한 범주에 넣는다면, 전설(sage)이란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 창세기 1장, 2장에서는 우리의 역사적 지식 밖에 있는 사건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설화(geschichte)에 관련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사건을 말한다. 성서의 창조설화(schofungsgeschichte)에서 놀라운 사실은, 이 성서의 창조설화가 이스라엘의 설화 또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언약에서 활동하시는 설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약 성서에 의하여, 이 설화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로 시작한다. 창세기 1장, 2장의 창조 설명은, 확실히 구약성서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1장의 설명은, 안식일 제도에서 언약이 창조사역의 목표(目標)임을 보여주며, 2의 설명은, 언약이 창조사역의 계속(繼續)임을 보여준다.18 』


이 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바르트는 창조기사를, 생성과 소멸, 즉 만물창조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창조기사는, 전설(sage)의 범주에 들고, 사건을 설화(고대소설)로 말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창조설화는, 창조가 목표가 아니고, 언약이 목표라고 하였다.

ⓐ 바르트는 창조기사를 생성과 소멸의 기록, 즉 만물창조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바벨론 신화에서는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에 관한 신화를 취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을 창세기 1, 2 장은 전연 문제 삼지 않고 있다. 바벨론 신화에서는 신화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할 수가 있지만, 성서에는 신화에 비할만한 것이 전혀 취급되어 있지 않다. 」


이 인용구는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해설한 것이다. 창조기사 해설에는 세 가지의 유형이 있다.

창조는 실화(nonfiction)이다. 이것은 정통주의 신학이 2천 년간 지켜온 해설방식이다.
창조는 꾸며낸 신화(myth)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했던 해설방식이다.
창조는 꾸며낸 설화(geschichte)이다. 이것은 신정통신학과 신복음주의 신학이 주장해온 해설방식이다.

바르트는 창세기의 창조를 바벨론 신화에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바르트는 생성과 소멸에 대한 기사는 바벨론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생성과 소멸에 관한 기록으로 보는 것은,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바벨론 신화와 동일한 신화로 취급하는 것임으로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통신학은 지난 2천 년간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생성과 소멸에 관한 기록으로 믿어왔다. 바르트가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생성과 소멸”에 관한 것임을 부정한 것은 곧 하나님이 만물의 창시자(originator)임을 부정한 것이다.

기독교는 2천 년간 창세기 1, 2 장을 생성과 소멸에 관한 실화(nonfiction)로 믿어왔고, 때문에 하나님을 세계의 창시자로 믿고, 창조를 세계의 존재원인으로 믿어왔는데, 바르트는 이러한 정통신학의 창조교리를 바벨론 신화와 동급으로 취급하여 배격하였으니, 바르트의 신개념에는 세계의 창시자의 뜻은 없다.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이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임을 거부하고, 진화론을 주장하였듯이, 바르트도 하나님이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이심을 거부한 진화론자임이 들어났다. 바르트가 비록 자유주의 신학처럼 하나님을 창시자로는 믿지 아니하였으나, 성서를 신화로 보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성서를 바벨론 신화처럼 취급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창조기사를 어떻게 취급하자는 것인가? 신화가 아니라, 설화로 취급하자고 하였다.

ⓑ 창조기사는, 전설(sage)의 범주에 들며, 사건을 설화(geschichte)로 말한다고 하였다


「 우리가 성서의 설화(geschichte)에다가 이름을 주어 한 범주에 넣는다면, 전설(sage)의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 창세기 1, 2 장에서는 우리의 역사적 지식 밖에 있는 사건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설화에 관련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사건을 말한다.」


인용문은 창세기 1, 2장에 대한 해설이다. 창세기 1, 2 장은 설화(geschichte)이며, 전설(sage)의 범주에 든다고 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설화”이며, “전설”의 범주에 드는 창세기 1, 2 장은 “역사적 지식 밖의 사건”이라고 하였으니, “설화”와 “전설”은 “역사적 지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하고자 한다. 첫째는 geschichte와 sage의 뜻이고, 둘째는 창세기 1,2장은 “역사적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첫째로 geschichte와 sage의 뜻

독일어 geschichte는 한국어로는 설화이다. 이 geschichte가 영어로는 narrative(설화) 혹은 story(설화)에 해당한다.19   설화는 신화와 전설을 내포한 고대소설이나, 옛이야기를 뜻한다. Barth가 geschichte를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신화와 전설이 섞여 쓰인 고대소설이나 옛이야기의 뜻으로만 사용하였으므로,20   geschichte를 영어 narrative나 story로 번역했을 때에는 그 뜻을 반듯이 설화로 한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영역(英譯) 시에 geschichte를 narratvie로 번역하지 않고, history로 번역한 것은 큰 실수였다. 독일어 sage21 는 고대어에서나 현대어에서 동일하게 “전설” 혹은 “전설적인” 의미로만 사용한다.22   그러나 영어 saga가 고대어에서는23 “전설,” 혹은 “전설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으나, 현대어에서는 “이야기”로만 사용한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영어 saga는 독일어를 번역한 것임으로, saga는 독일어 원문(sage)의 뜻대로 “전설”로 번역해야 한다.

둘째로, 바르트가 창세기 1,2장을 “역사적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

바르트가 창세기 1, 2장을 왜 “역사적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창시자(originator)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뿐인가? Barth는 예수님의 성령수태와, 동정녀탄생과, 몸의 부활 일체를 믿지 않았다.

바르트가 창세기 1, 2 장을 실화(nonfiction)로 보지 않고,「전설이나 신화」로 보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옛이야기」에서 교훈을 끌어내, 복음으로 선포하였으며, 사람들은 그 교훈에 감탄하였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TV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웃으며 교훈을 받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신정통주의 신학이나 신복음주의 신학이, 성서를 역사(정통신학)나 신화(자유주의 신학)로 취급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성서를 설화(옛이야기, 고대소설)로 취급하여, 설화에서 교훈을 받아내, 이 교훈을 복음으로 선포하고 가르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창세기 1, 2장만 이렇게 본 것이 아니다. 모든 기적을 이렇게 보았다. 즉 바르트는 신구약의 모든 기적을 전설과 고대소설로 보아, 기적들을 실화나 역사로는 믿지 않지만, 신비로운 기적의 속뜻을 풀어내,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 혹은 구원의 복음으로 선포하였다. UN과 WCC가 그의 지도를 받았고, 지금도 현대신학을 따르는 신학교와 교회들은, 바르트의 신비로운 교훈에 귀를 기우려 경청한다.

설화(geschichte)는 전설과 신화가 섞여 쓰인 고대소설을 뜻하지만, 바르트의「교회교의학」24   영역(英譯)에서는 설화(geschichte)를 역사(history)로 오역(誤譯)하였고, 이 誤譯이 세계에 소개되어, 바르트신학을 미궁에 빠뜨렸다. 필자가 英譯으로 교회교의학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아서, 독일어 원본을 대조하여 보니, 바르트는 역사는 반드시 historie로 말하였고, 기적은 반드시 geschichte로 말한 것을 알게 되었다.25   Van Til, Klooster, Clark 세 교수가 1961년에 Christianity Today 잡지를 통하여 바르트에게 질문할 때에, geschichte의 뜻도 물었으나, Barth는 끝내 답하지 않고 죽었다고,26   Van Til 교수가 필자에게 말해 주었다(1985).

3)  바르트는 창조설화는, 창조가 목표가 아니고, 언약이 목표라고 하였다


『 성서의 창조설화(schofungsgeschichte)에서 놀라운 사실은, 그 창조설화가 이스라엘의 설화 또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언약에서 활동하시는 설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약 성서에 의하여, 이 설화(geschichte)는 하나님의 천지창조(天地創造)로 시작한다. 1장, 2장의 창조 설명은, 확실히 구약 성서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1장의 설명은, 안식일 제도에서 언약이 창조사역의 목표(目標)임을 보여주며, 2장의 설명은 언약이 창조사역의 계속(繼續)임을 보여준다. 』


바르트는, 성서의 창조설화가 목적하는 바는, 창조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의 주제인 “언약”을 설명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즉 창세기 1장은, 안식일 제도에서, 구약성서의 주제인 “언약”이 창조사역의 목표임을 말하고, 창세기 2장은, 구약성서의 주제인 “언약”이 창조사역의 계속임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바르트가 앞에서는 창조설화는 “역사”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설화”(고대소설)로 취급할 것을 주장하더니, 여기서는 창세기 1, 2 장의 목표가 “창조”가 아니고 “언약”이라고 하여, 창세기에서 물질창조를 아주 폐기해버렸다.

바르트가 창세기 1, 2장을 전설(sage)의 범주에 넣어, 실화(nonfiction)가 아닌 설화(고대소설)로취급하고, 창세기 1, 2장의 창조설화(Schofungsgeschichte)가 목적하는 바는, 창조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의 주제인 “언약”을 설명하려는데 있다고 말하여, 성서에서 유일하게 만물의 창조를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 2장에서 물질창조와 창시자를 삭제해버린 것이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만물창조를 불신하여 성서에서 폐기하였지만, 바르트가 언약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바르트의 신학이 여전히 기독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기독교에서 언약의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창세기 1, 2장을 고대소설로 규정한 바르트가 고대소설에서 끌어낸 언약이, 기독교가 믿어온 언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언약은 이교도(異敎徒)의 언약일 뿐이다. 다음은 바르트가 주장한 언약의 해설이다.

4)  바르트가 말하는 언약의 의미

바르트가 말하는 언약의 뜻은 무엇인가? 다음 “바르트의 언약주해”는 박봉랑 교수와 이종성 교수의 해설에 의존하여 준비한 것이다.27   두 교수는 현대신학 해설에 있어서 대가이다.

바르트는 창세기 1:26-27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언약으로 보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관계를 말하는 「나와 너의 관계」였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남녀로 창조하여,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인 「나와 너의 관계」를 허락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남녀가 갖는 「나와 너의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과 동질성(類比, analogia)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 「성부와 성자」의 관계였고, 이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인간피조 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도「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주셨고, 이것을 다시 율법과 계명으로 이루어지는 「신과 인간」의 관계와.「이웃과 이웃」의 관계로 주셨다고 보았으며, 바르트는 이 “관계성”을 가리켜 신이 인간과 맺은 “언약”이며, 이 언약이 곧 복음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바르트가 말하는 창조는 언약이며, 이 언약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이루어지는 「나와 너의」 관계성이며, 이 관계성이 복음이라 하니, 이 관계성의 복음은 대속의 언약이나 복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이 이웃끼리 갖는「나와 너의」의 관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하라고 주신 율법과 계명을 지킬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이 율법언약을 저버리는 것이요, 구원은 이 율법언약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진다. 즉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에 들어가 계명을 받아드려서, 이웃끼리「나와 너의」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여, 지상에서 화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바르트의 말을 듣고 있자면, 마치 바르트가 영생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언약은, 창세기를 고대소설로 보고, 고대소설에서 말하는 언약이므로, 바르트신학이 말하는 화해의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고, 내세도 영혼도 없고, 현세뿐이고, 죽으면 끝이다. 바르트가, 인간의 생존을 현세에 한정하였기 때문에, 바르트신학에는 영혼도 없고, 부활도, 내세도, 영생도 없다. 필자의 해설이 믿어지지 않으면, 바르트의 교회교의학(Karl Barth, Church Dogmatic, III/4, p. 568, 579)을 읽어보라.

사람들이 바르트신학을 가리켜,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그리스도 일원론」은, 성경 전체를 신구약성서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언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웃과 이웃」이, 「종교와 종교」가, 「나라와 나라」가 「나와 너의」 관계를 회복하여,「사랑을 주고받는 화해」를 이루도록, 모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일원론」이다. 이것이 바르트신학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바르트는 창세기 1, 2장을 생성과 소멸을 기록한 역사로 취급하지 못하게 하였고, 대신 창세기 1, 2 장을 창조설화(schofungeschichte)로 취급하여, 언약이 창조설화의 목표라고 해설하고, 언약을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설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에서 다시 「너와 나의」 관계라는 화해의 도식(the diagram of reconciliation)을 끌어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일원론」이라는 억지 성경 해석법을 끌어다가 창세기 주석에 적용하여, 창조(創造)를「나와 너의」 관계라는 언약(言約)으로 바꾼 후에, 창세기 1, 2장에서 만물창조와 만물의 창시자(originator)를 삭제하였으니, 바르트의 성서에는 만물창조나, 만물의 창시자가 없다. 그렇다면 바르트의 우주론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해답은, 빅뱅과 진화론에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와, 사범학교를 거치던 시절(1940-1950년대)에는 국어 교과서에서조차 창조나, 조물주라는 용어를 접하였으나, 지금은 현대신학에서조차 “만물창조”나 “창시자”라는 용어를 전혀 볼 수가 없다.


4. 바르트의 기독론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였고, 장사 후에는 육체가 살아났고, 승천하심으로 신인양성(神人兩性)을 겸전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불신하였고, 인성(人性)뿐인 단성으로 보았다. 그는 사도신경 주석, 「탄생의 신비(mystery)와 기적」28   이란 글에서, 자신의 불신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우리는 이제 기독교회 중에서 이제껏 또 언제나 거리낌이 되는 장소의 하나, 그 유일한 장소라고도 말할 수 있는 곳에 와 있다. 아마 제군은 이제껏 설명한 데까지는 그 결말이 어떻게 될까하는 초조한 마음을 품고라도 잘 따라왔지만, 이 항목에 와서는(이제 취급하려는 것은 나의 발견이 아니고, 교회의 고백인데) 제군은 무언정지(無言停止)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으로 그것을 납득하려는 것이 아니고, 비교적 안정하게 길을 걸어왔듯이, 같은 안정과 사실에 충실하므로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이 구절에 접근하려고 한다. 이 항목에서도,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의를 품고 진리에 접근하기를 원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믿어야만 하는가?”라는 불안한 질문이 최후에 남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도 “기쁨으로 긍정을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최후로 남는다. 』29


(1)  “동정녀출생은 거리낌을 주니,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성경에 거리낌이 되는 곳이 많지만, 동정녀출생이 가장 큰 거리낌을 주는 장소라고 하였다. 수강생들도 거리낌이 되는 다른 것을 수강하는 동안에는, 초조한 마음이기는 하나 비교적 잘 따라왔지만, 이 동정녀출생의 항목에 이르러서는 무언 정지하여, 목석처럼 말문이 닫혀버릴 것이라고 염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안심시켰다.


「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동정녀탄생을 납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비교적 안정하게 길을 걸어 왔듯이,
  이 구절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다만 진리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풀어야할 과제도, “성령수태를 믿어야하는가”하는 질문이 아니다.
  다만 “성령수태를 긍정할 수 있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바르트가 주장하기를, 성경에는 거리낌이 되는 곳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동정녀탄생은 가장 큰 거리낌을 주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르트가 주장하기를, 동정녀탄생을 납득하여 믿으려는 것이 아니고, 동정녀탄생이 가르쳐 줄 진리(교훈)에 접근하려 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이 글에서,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주장하였으니, 동정녀탄생을 “납득하여 수용하는 것”은 부정하였고, 동정녀탄생이 주는 “진리(교훈)에 접근하는 것”은 긍정하였다. 결국 바르트는 기적 사건으로서의 성령수태와 동정녀탄생은 화제에서 삭제하였고, 성령수태와 동정녀탄생이 주는 교훈(진리)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으니, 바르트는 자기 신학에서 기적은 불신하여 폐기한 것이다.

(2) “동정녀출생은 마리아의 배가 아니라, 마리아의 귀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 이것이 탄생의 이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없이 출생한 기적이다. 그것(기적)이 종교사중(宗敎史中)에 있는 바와 같은 인간이 신들로 말미암아 수태되는 신화와는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는 이 같은 출생은 문제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 자신이 창조자로 등장하여 그 동정녀의 상대자가 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초대예술이 여기서 성적 과정이 상관없다는 것을 재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출생은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의 귀에서 실현되었다고, 흔히들 말한다. 』30


예수가 마리아의 배(belly)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귀(ear)에서 출생했다고 하였다. 애기가 귀(ear)에서 출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여하튼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바르트가 답변한 내막은 이렇다. 여인이 아직 남자를 접한 일이 없는 동정녀라 하니, 배(belly)로 애기를 출산한 일은 없을 것이므로, 동정녀가 애기를 잉태하고 출산했다는 것은,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귀로 들었던 설화(geschichte, 고대소설)에서의 잉태와 출산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동정녀의 출산은 고대소설(성서)이 말하는 출산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천사가 전했던 예수의 잉태와 출산을, 동정녀가 실제로 잉태하고 출산한 기적으로 믿지 않았다. 천사가 전했던 동정녀의 잉태와 출산을 설화(고대소설)로 돌려서, 설화에서 출산한 것으로 해설하고, 설화에서 교훈을 끌어냈다.

(3) 성령수태 설화(geschichte)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 그러나 제군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이 표현에는, 반드시 어떤 특수한 뜻이 표시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꼭 주목해야 한다. 성령수태와 동정녀의 출생 이야기는 확실히 이상한 잉태와 이상한 출생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예수의 출생이라고 말한다. 이 기적 곧 이 잉태와 출생이 가리키는 바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는 비의(秘意, mystery)이다.
성령으로 수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것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갖지 않았다는 부정만을 말할 뿐이다. 그의 잉태에 있어서는, 보통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할 때에, 생기는 일과 같은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이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 자신의 자유에서 즉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서 사랑의 붕대로 “하나가 되어지는” 자유에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실존의 시작”을 볼 때에, “성부와 성자”가 하나가 되어지는 신성의 궁극적 깊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내적 생의 자유이며, 이 자유에서 이 인간의 실존이 기원(紀元)의 제 1 년을 시작한다 . . . 이것이 탄생의 이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없이 출생한 기적이다. 』31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수태하고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설화(geschichte)에 접근하여, 바르트가 얻어낸 숨은 뜻(mystery)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설화에서 해석해낸 교훈은 무엇인가? 성령수태과 동정녀출생의 설화에 접근하여 교훈을 해석해내기에 앞서, 인용문에 등장한 특수한 용어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는 비의(mystery),
“성부와 성자”가 “하나가 되어짐,”
“인간의 실존,” “예수의 실존의 시작,”
“기원 제 1 년의 시작.”

이 용어들을 구심점으로 하고, 문장을 다시 구성해 본다.

ⓐ 성령수태의 교훈은, 「성부와 성자가」 하나 되어진 것을 뜻하며,
ⓑ 「성부가 성자가」 하나가 되어진 것은, 예수가 「참 하나님, 참 사람임」을 뜻하며,
ⓒ 예수가 「참 하나님, 참 사람이」되신 것은, 곧 「예수가 실존의 시작임」을 뜻함으로,
ⓓ 이 「인간 실존」을 「기원 제 1년」으로 삼자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본다. 이 바르트의 주장은 다 신비로운 표현들(mystery)이고, 특히 인간의 실존은 더욱 어려운 표현이다. 인간의 실존은 실존주의 철학과 실존주의 신학의 핵심개념이다. 앞에서 이미 해설한 대로, 실존주의 철학과 실존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실존”은 타락과 부패를 벗어난 「참 인간」을 뜻하고,32   하나님처럼 변화된 「참 인간」을 뜻한다.

바르트가 성령수태와 동정녀출생을 불신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肉身)으로는 요셉의 혈통을 받은 요셉의 아들이지만, 그가 살고 간 생애와 교훈과 죽음은, 인류의 역사상 단 한 번만 있었던 위대한 사건으로서, 이것이 「참 인간의 출현」을 뜻하고, 이것이 참 「인간 실존의 출현」을 뜻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고, 현대주의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났던 이 위대한 「인간의 실존」을 「紀元 제 1년」으로 삼자는 것은, 예수의 인격을 모델로 하는 「전 인류의 새 紀元」을 열어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님이나 석가님도 훌륭하셨던 분들이지만,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이 더욱 훌륭하므로,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났던 「인간의 실존」을 모델로 하여, 전 인류의 「새 紀元과, 새 세상을 열어보자」는 것이다.

이 바르트의 구원론에서 꼭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바르트가 말한 그리스도의 구원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구원교리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르트가 믿은 그리스도는 요셉의 혈통을 받은 보통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준다는 구원도 제자가 스승의 인격을 본받아서, 고매한 인격을 갖추어 가는 것이 구원이고, 또한 인류가 지상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비록 31권의 방대한 「교회교의학」을 썼지만, 이 책에는 최후심판과 내세의 영생 등은 항목에도 들어 있지 않다.


      Note

14. 전경연 번역, 칼 바르트, 바르트교의학 개요, p. 71 (1975 개정판), Karl Barth, Dogmatics In Outline, tr.
      by G. T. Thomson, p. 50
15. Ibid., Korean version, p. 76,; Ibid., English version, p. 53
16. G. C. Berkouwer, 칼 바르트 신학, 조동진 번역, p. 47 (1975)
17. Karl Barth, Letters, 1961-1968, tr. by Bromeley, p. 7 (Eerdmans, 1981)   "I sincerely respect the seriousness with
      which a man like Berkouwer studies me and then makes his criticisms."
18. Karl Barth, Dogmatik Im Grundriss, p. 59 (Germany, 1947); 전경연 번역, 칼 바르트, 바르트 교의학개요,
      p. 73 (성문학사, 1986) Karl Barth, Dogmatics in Outline, tr, by G. T. Thomson, p. 51
19. 독일인들은 geschichte를 신화와 전설을 섞어 쓴 고대소설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미국에서 바르트의
      "교회교의학(Church Dogmatics)" 번역 시에, geschichte를 history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었다. 1950년대 이후에
      영국의 J.I. Packer와 J. Stott가 geschichte를 story나 narrative로 번역하였고, 1980년대에 Yale 대학교 교수들이,
      Hans Frei 교수가 중심이 되어 narrative로 번역하였으며, 한국어 번역 설화는 신화와 전설을 내포하기 때문에,
      적중한 번역이다.
20. 한종희,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 pp. 162-178, 제5장, 12 "geschichte의 의미"
21. 한종희,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 pp. 179-189, 제5장, 12 "sage의 의미"
22. Webster's 3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1981. The World Book Dictionary, 1978
23.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Fourth Edition, 2000
24. 바르트가 쓴 "교회교의학", 독일어 원본은 31권의 9,000 페이지 책이다.
25. Karl Barth, KD III/1, p. 87; CD III/1, p. 80; 한종희,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신학", pp. 168-170
26. 한종희,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신학", pp. 18-24 (총회출판)
27. 박봉랑, 하나님의 형상, 칼 바르트의 신앙, (기독교사상, 1961년 5월호)
      박봉랑, 하나님의 형상, 교의학 방법론, pp. 213-214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이종성, 창세기 1:26-27의 해석문제, 신학적 인간학, P. 51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28. 전경연 번역, 칼 바르트, 바르트 교의학 개요, p. 143 (성문학사, 1986)
      K. Barth, Dogmatics in Outline, p. 98-99, tr. by G. T. Thomson, (Harper & Row, 1959)
29. Ibid., Korean verson, p. 137; Ibid., English version, p. 95
30. Ibid., Korean verson, p. 144; Ibid., English version, p. 99; "And it has well said that this procreation was
      realized rather by the way of the ear of Mary, which heard the Word of God."
31. Ibid., Korean verson, p. 143; Ibid., English version, p. 98-99
32. 안병욱, 현대사상, pp. 242-243 (삼육출판사, 1982)


^ RETURN TO TOP ^


          Page >>>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