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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           한종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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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르트의 종말론

기독교는 인류와 역사의 종말과, 내세 천국의 영생을 믿기 때문에, 종말론을 중요하게 다루지만, 바르트는 인류와 역사의 종말과, 내세 천국의 영생을 불신하기 때문에,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종말론을 쓰지 않았다. 정통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역사의 종말을 믿기 때문에, 종말을 말하는 것이 추상적이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고, 아주 구체적이며 실제적이지만, 바르트는 역사의 연장만을 말하고, 인류와 역사의 종말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

지옥에 대하여

바르트는 지옥의 존재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에 답하기를, 「지옥은 내세에서 겪을 불행한 상태가 아니고, 다만 현세에서 겪는 불행한 상태이다」라고 말하여, 내세의 지옥을 불신하고 버렸다. 다음은 지옥에 대한 학생의 질문과 바르트의 답변이다.


「 질문: 도대체 지옥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답변: 내가 생각하기에는 존재의 지속성을 정지함이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함이 없이, 당신의 현존성을 상실하는, 환언하면 창조주로부터, 당신의 이웃으로부터, 인간의 공동존재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저주받은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지옥(地獄)에는 이러한 분리와 분열과 우리 존재의 반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지옥 불에 관하여 언급할 때, 그것은 이와 같은 인간의 와해와 분리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옥이란 창조주의 목적과 우리 자체의 본질적인 존재와 모순 하여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고, 우리 존재의 와해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다만 파괴되지 아니한 우리 존재의 모순을 의미하지요.」



⒜ 지옥은 무엇인가? "존재의 지속성을 정지함이 없이”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현세의 삶을 가리킨다. 즉 지옥의 이야기가 내세(來世)가 아니고, 현세(現世)의 삶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함이 없이”는, 인간이 비록 타락했다고 하나, 완전히 구제불능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간의 실존)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용문의 끝에서 “파괴되지 아니한 우리 존재의 모순”이라고 말한 것이다. 인간은 비록 모순덩이의 존재이지만, 파괴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형상(인간의 실존)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을 지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존재의 모순으로 말한 곳이 없다. 성경은 내세를 말하고, 내세를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서 말한다. 이처럼 바르트의 주장은 성경과는 무관하므로, 기독교와는 무관한 바르트 개인의 철학일 뿐이다.

⒝ 이 글 초두에서 바르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이라고 한 말은, 지옥의 해설이 바르트 자신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바르트는 성경이 말하는 내세를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옥뿐만 아니라 교의학에서 열거한 모든 항목에서 바르트는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물론 바르트가 전통적인 신학용어들을 다 사용하였고, 전통적인 교의학의 항목들을 다 말하니까, 바르트가 정통주의 신학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정통주의 신학의 내용은 철저히 버렸고, 오직 자신의 생각으로 신학을 구성하였다. 만일 바르트가 자기의 생각을 직선적으로 표현했다면, 바르트신학을 사람들이 “신 정통신학”으로 곡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성경을 빗대어 말하고, 정통주의 신학의 용어와 그 구성 원리를 적용하여 말하니, 사람들이 곡해하여, “신 정통주의 신학”으로 호칭하였고, 이 곡해한 명칭이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트 자신은 성서를 고대소설로 보았으며, 정통이라는 용어를 지극히 싫어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학을 “신 정통주의 신학”으로 호칭한 적이 없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호칭으로 복음주의를 선호하였다.


6. 바르트의 부활론

바르트 교수님은 영생을 믿으십니까? 이 질문은 Rugg라는 사람이 바르트에게 서신으로 물었던 질문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답변이 동문서답이 되었기 때문에, 질문자는 두 번째 다시 편지를 띠워 물었다. 「 교수님 제가 처음에 물었던 질문내용은 교수님이 답하신 그런 내용이 아니고, 사람이 죽은 후에도 살아가는 영생을 믿으시냐고 물었습니다.」 다음은 바르트가 두 번째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내가 지난 주일에 답했던 내용은, 나 스스로도 만족한 답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게 처음에 물었던 것은, 사후에도 제2의 세계가 다시 있는가 하는 것이었지요.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영생은 이 세상의 생존을 넘어선 다른 무엇이거나 혹은 제2의 생명이 아니라, 바로 지금 생존하고 있는 이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34


이 바르트의 답변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다. 바르트는 현재의 삶을 영생으로 보았다. 이로서 바르트의 내세불신이 확실하게 들어났다. 바르트의 서간문집이 독일에서 발간된 것이 1971년이었고, 영역 출판이 1981년인데, 필자가 수중에 넣은 것이 1982년이었다. 그 때까지 Van Til이나 박형룡 교수까지도 바르트가 이적과 내세를 믿는지의 여부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이므로, 필자가 고심하던 중이라, 서간문 책을 접하고 바르트신학의 성격을 확정짓게 되었고, 1985년에 비로소 「바르트의 성경관」이란 논문을 신학지남에 게재할 수 있었고, 바르트에 대한 연구 속도가 빨라졌다. 정통신학이 바르트신학에 대하여 두 가지 문제로 고심하였다.
바르트가 내세를 믿는가?
바르트가 geschichte를 무슨 뜻으로 사용하는가?”
필자는 Rugg의 질문과 바르트의 답변에서 첫째 문제를 해결하였고(1982), geschichte의 분석은 1998년에 완성하여, 같은 해에 목회에서 은퇴하고, 3년간 책 집필에 전념하여, 2002년에,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을 출판할 수 있었다(합동측 총회출판, 2002).

1)  사후의 생을 바라는 자는 이방인이다

이 말은 바르트가「사도신경 강해」에서 한 말이다. 바르트는 1946년 독일 본 대학교에 가서 사도신경을 한 학기 동안 강의한 일이 있었으며, 그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할 때에 이름을 「교의학개요」(Dogmatik im Grundriss-Dogmatics in Outline)라 하였다. 바르트 자신이 서문에서 말한 대로, 이 책은 그가 쓴 방대한 9,000페이지의「교회교의학」(Die Kirchliche Dogmatik-Church Domatics)을 200페이지 분량으로 주려서 쓴 것이다. 또한 이「사도신경 강해」의 1946년 판은 세 번째의 개정판이므로, 내용과 문장이 아주 잘 정선된 글이며, 신학의 모든 항목이 골고루 다루어진 바르트신학의 종합판이기 때문에, 이 작은 책 한 권은, 바르트신학을 정확하게, 빠르게,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다. 바르트는 이 책 마지막 부분 24장, “육의 부활과 영생”이란 항목에서, 영생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 그리스도인은 현세에서 앞을 바라본다. 그리스도인이 이생에서 가지는 소망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후의 생인가? 죽음과 분리될 수 있는 사건인가? 마치 벌이나 나비와 같이 영원불멸의 생을 누리기 위하여 무덤 위를 날아다니는, 그리고 어디엔가 보존되어 있을 영혼인가? 사후의 생을 바라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아니다. ‘나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는 성경 말씀 중에서, 육체는 단순히 사람을 가리킬 뿐이다. 즉 죄 아래 있는 인간, 낮아진 인간을 말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에게 너는 일어나라고 성경은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금 살아 있는 이 생명의 연속을 의미하지 않고, 이 생명의 완성을 의미한다.”』35



⒜ 바르트는 이 글에서 분명히 주장하였다.


「 그리스도인이 이생에서 가지는 소망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후의 생인가? . . . 마치 벌이나 나비와 같이 영원불멸의 생을 누리기 위하여 무덤 위를 날아다니는 그리고 어디엔가 보존되어 있을 영혼인가? 사후의 생을 바라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고,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아니다. 」



바르트가 또 주장하기를, 「 부활은 살아 있는 이 “생명의 연속”을 의미하지 않고, 이 “생명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부활이 “이 생명의 연속”(the continuation of this life)을 의미하지 않는다 함은, 시간적인 영생의 부정이니, 내세의 영생을 부정한 것이고, 대신에 부활이 “이 생명의 완성”(this life's completion)을 의미한다 함은, 인간이 이승에서 성취할 인격적 완성을 의미하였다.

⒝ 그리고 바르트가 「사후의 생을 바라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였으니, 바르트가 사후의 생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을 이방인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이방인이라는 표현에서, 바르트가 몸의 부활과 사후의 영생을 얼마나 강하게 거부하며, 또 사후의 영생을 믿는 정통신학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 강도를 알 수 있다. 같은 책에서 바르트는 사후의 생을 바라는 정통신학을 향하여 가진 독설을 다 퍼부었다.

짓지 못하는 개요(48쪽),
저주를 받을 자요(같은 책, 48쪽),
믿지 않는 불신자요(49쪽),
묘지에 처넣기 위해 밀쳐진 자라고(49쪽) 하였다.36

⒞ 바르트가 시신의 부활을 받아드릴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을 유한한 자로 보았고, 영혼 없는 물질로만 본 유물론자였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인간이 유한하여 죽음으로 끝나고, 죽음 후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우리들이 인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뿐이다. 인간을 출생과 사망으로 한정지어져 있는 운명으로 이해하고, 이렇게 받아드려야 하며, 인간의 존재를 반드시 이러한 뜻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음을 말한다. 즉 인간의 생명은 무한한 것이 아니고, 유한한 것이다. 인간은 단지 출생하여 사망까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지나쳐가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아주 명백한 진리임에 틀림없다.」37



⒟ 바르트는 예수의 부활을 어떠한 뜻으로 받았는가? 바르트는 사도행전 1:1-14을 주석하여, 성경의 부활설화는 “기적의 부활”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기록이 “기적의 성격”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여, 성경의 부활기록에서 기적을 배제하였고,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정신이 살아서, 살아난 예수의 정신이 제자들의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 놀라운 부활사건의 이적적인 성격은 신약성경의 부활보도에 아주 분명하게 들어나 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 장사지낸바 되었던 자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고, 제자들 앞에 걸어왔고, 또 제자들과 함께 말하고, 먹고, 마셨으며, 다음에는 다시 사라졌다고 즉 단순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로 사라져갔다고 하는 이야기는 확실히 희한하고, 놀라운 이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제자들이 기록한 기록의 이적적인 성격보다 기록 자체에 강조점을 둘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가 부활묘사에 대한 글을 주의 깊게 읽거나, 그 기록들을 다른 비슷한 묘사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부활묘사에 대한 기록들은 아주 조심성 있게 그리고 억제당한 상태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제자들을 자극하고, 제자들이 묘사하기를 원했던 것은 사건 자체의 이적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38



이 글의 핵심은 두 가지의 비교에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한데 있다. 즉 행1:1-14의 부활에 대한 기록이 진정한 기적의 부활기록이냐? 혹은 부활에 대한 기록이 이적의 성격으로 기록된 것이냐? 바르트는 성서가 말하고자 한 것은, 전자가 아니고 후자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행1:1-14의 부활기록이, 기적의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고, 다만 부활의 기록이 기적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고, 동시에 부활기록이 사실(nonfiction)의 기록이 아니고, 설화(geschichte)39의기록 즉 “옛날소설”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앞의 인용구절에 연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제자들은 기적에 관한 믿음을 입증하려한 것이 아니고, 신비로운 상태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깨어난 새벽에,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를 자신들이 인정하려 했을 뿐이다. 즉 주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와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신을 주님으로 승인하게 하여준 사실을 입증하려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어 있는 제자들을 깨어 일어나게 하여준 신비로운 사실을 제자들이 입증하려 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살아있는 주님의 임재를 입증하려 하였다. 』40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제자들이 부활을 말한 것은, 기적에 관한 믿음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이 부정은 그리스도의 시신부활을 부정한 주장이다. 반대로 제자들이 부활을 말한 것은, 단지 예수님이 죽어 있는 제자들을 깨어 일어나게 하여준 신비로운 사실을 입증하려 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장사 후 3일째 되는 날 새벽에, 제자들이 돌변했던 사건은, 예수의 시신이 부활한 것과는 무관하며, 다만 제자들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다시 구주로 인정하게 되어진, 제자들의 심적 변화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살아있는 주님의 임재를 입증하려 하였다.”는 말은, 예수님의 교훈과 정신이 제자들의 마음에 다시 살아나, 함께 있다는 뜻이다.

2)  다음은 바르트의 부활주석(행1:1-14) 이다


『 부활사건(復活事件)의 놀라운 이적적인 성격은, 신약성서의 부활묘사(復活描寫)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 장사지낸바 되었던 자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고, 제자들 앞에 걸어왔고, 또 제자들과 함께 말하고 먹고 마시다가, 단순히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로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희한하고 놀라운 이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제자들이 기록한 기록(記錄)의 이적적인 성격보다, 기록 자체에 강조점을 둘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만일 우리가 부활묘사에 대한 글을 주의 깊게 읽거나 혹은 그 기록들을 외경이나 다른 비슷한 묘사에 비교해볼 수가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부활묘사에 대한 기록들은 아주 조심성 있게 그리고 억눌러진 상태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제자들을 자극시키고, 제자들이 묘사하기를 원했던 것은, 사건 자체의 이적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제자들은 확실히 실제적인 부활 장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아니하였으며, 단지 승천장면에 대하여서만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희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19). 우리는, 이 말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라는 말을 더 첨가할 수가 있을 것이다 . . . 그리스도가 살아났다는 진술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있다는 주장을 암시(暗示)하며, 그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암시일 뿐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해서,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암시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을 추상적(抽象的)으로 이끌어낸다면, 우리는 이러한 추상정도는 받아드릴 수도 있고, 내어버릴 수도 있고 혹은 비신화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이러한 행위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성서 본문과 성서 본문이 증거하는 바를 이해함에 있어서 적당한 방법은 아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기초로 삼을 수 없는 것들이다 』41


① 「제자들이 기록한 기록의 기적적인 성격보다, 기록 자체에 강조점을 둘 하등의 이유가 없다. . . 제자들이 묘사하기를 원했던 것은, 부활사건 자체의 기적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
바르트는, 죽은 자가 살아나고, 걸어 다니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고, 먹고 마시다가, 하늘로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참으로 희한하고,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제자들이 원했던 것은, 부활 자체를 기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기록을 기적의 성격으로 기록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Barth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시체가 무덤에서 살아나온 기적의 부활로 말하지만, 제자들이 기적의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적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② 제자들이 실제적인 부활장면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살아났다고 진술한 것은, 실제의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고,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 있는 것을 암시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덤이 비었다는 것도 역시 실제의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고,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있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③ 그리스도의 부활기록이 실제의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 기록이 부활의 성격을 띤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암시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을 추상적으로 말해서, 그 추상적인 부활을 주장하거나, 내버리거나, 비신화화 할 수는 있겠지만, 추상적인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아무데도 쓸 데 없는 짓이라고 하였다.

3)  바르트는 다음 인용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덤에서 살아나온 몸의 부활이 아니라,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부활절 메시지(message)이다.42   새로운 한 인간의 설화(geschichte)가43 이 셋째 날에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생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그의 죽음까지의 33년과, 죽음과 승천 사이에 있는 40일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 그러나 결정적인 기간이다. 이 셋째 날에 예수의 새로운 생이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에서 옛 세계가 완전히 물러가고 자리 잡힌 후에, 셋째 날에 새 시대(a new Aeon) 곧 세계의 새 형태가 시작된다. 부활절은 인간 예수의 실존(existence of the man Jesus)에서, 새 시대와 새 세계가 열려진 것을 말한다. 예수는 이제 정복자, 승리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그의 어깨에 메워진 인간의 죄 짐을 멸해버린 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변화한 예수의 실존(existence)에서 초대 교회는 예수의 새로운 생활이 이전 생활의 초자연적인 성격의 계속임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생, 즉 변화된 생인 것을 보았다.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시작도 보았다. 』44


바르트는 몸의 부활을 불신하였으나, 부활절이 주는 메시지는 크게 부각시켜서 주장하였다. 바르트가 주장한 부활절 메시지는 무엇인가? 인용문을 다시 정리해 본다.

① 부활절이 주는 메시지는 ‘새로운 한 인간의 이야기’가 셋째 날에 시작되어짐을 뜻한다고 하였다. 즉 ‘새로운 예수의 생’이 셋째 날에 시작되었음을 뜻한다고 하였으니, 예수가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무대에 다시 등장했음을 말한다. 여기서 바르트가 부활절이 주는 메시지라고 주장한 것은, 정통신학이 말하는 부활절 메시지와는 정 반대되는 개념이다. 정통신학은 부활절 메시지를 육체부활로 받아드린다. 사도들이 본 것이 육체부활이었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부활이 육체부활이었고, 교부들이 계승하여 고백한 사도신경이 육체부활이었다. 오늘까지 내려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역시 육체부활이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것을 뒤 엎어버린 것이다. 바르트는 부활해석에서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을 배제하였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시대의 시작을 뜻한다고 주장하였다.

② 그래서 바르트가 주장하기를, 예수의 죽음에서 옛 세계가 물러가고, 셋째 날에 새 시대(a new Aeon), 곧 새 형태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하였다. 초대교회는 이 변화한 예수의 실존(existence)에서 새 시대의 시작, 새로운 세계의 시작도 보았다고 하였다.

이 글의 핵심은 다음 용어들이다. ‘새 시대,’‘새 형태의 세계,’‘예수의 실존,’‘새 시대의 시작,’‘새로운 세계의 시작.’ 바르트가 이 용어들로 무엇을 말했을까? 이 책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밝혀진 대로, 바르트가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한 예수를 가리켜, 예수의 실존이라 하였고, 동시에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한 이 예수는 옛 세계를 벗은 인간상이요, 동시에 새 시대의 시작과 새 세계의 시작을 연 인간상이라는 주장이다.

바르트는, 예수의 육체가 부활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교훈과 모범된 생활이 셋째 날에 제자들의 가슴 속에 되살아난 것을 부활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정신이 제자들에게 살아나서(부활하여), 비로소 제자들이 새 시대와 새 세계를 열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제자들로 시작된 새 시대와 새 세계가 전 인류에게 확산되는 날에는, 반드시 지상에서 죽음(죄악, 갈등, 전쟁)이 물러가고, 화해와 평화의 새 시대가 열릴 것을 희망하여 말한 것이다.

4)  바르트가 이 글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보여준 낙관론 . . .

바르트가 이 글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보여준 낙관론은, 바르트 이전의 그 어떤 사상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우 적극적이고 강력하다. 칼 막스 역시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이 반듯이 지상에서 불평등을 몰아내고, 공산화(共産化)로 지상낙원을 이룰 것을 확신했으나 무산자(프롤레타리아)의 무한 폭력으로, 소련과 중국이 자기 동족을 재판도 없이 수천만 명씩 학살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에게 재앙이 덮쳐 전혀 희망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Barth가 그의 나이 불과 33세 되던 1919년에 로마서 주석을 들고 혜성처럼 나타나, 강력한 낙관론을 펴서, 세계 평화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외쳤다. Bultmann, Brunner, Tillich 등 당시 30대의 젊은 청년들도 바르트의 뒤를 따라 인류에게 희망을 주려고 낙관론을 펼쳤다. 사람들은 이 학자들을 신정통주의라고 불렀다. 유럽의 신학자들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신학자들도 가세하여 희망의 신학을 외쳤으며, 영국 신학자들(C. S. Lewis, John Stott, James I. Packer)은 이러한 신학을 “복음주의”라 칭하였고, 미국 신학자들(Billy Graham, Harold J. Ockenga, E. Carnell, Carl Henry)은 “신복음주의”라고 칭하였다.

5)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폈다.


「 만일 사람이 부활절을 어떤 소생 즉 피조물의 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 곧 봄이나, 인간이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것에 관계시킨다면, 이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봄에는 겨울이 따라오고, 아침 기상에는 밤에 자는 일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취급하는 것은 신구(new and old)의 주기적인 변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부활절에 단번에 성취된 새 변화를 말한다. 」45


여기서 바르트는, 마치 봄, 여름, 가을이 주기적으로 변하듯이, “사람이 태어나서, 죽었다가, 무덤에서 몸이 살아나오는 변화”를 부활로 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 하여, 육체부활을 버렸고,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다만 부활절 아침에 단번에 성취된, 새 변화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부활절 아침에 단번에 성취되었다는 새 변화는, 십자가 앞에서 좌절했던 제자들이, 셋째 날 아침에 불현듯 일어나, 불길 같은 힘으로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사랑과 정의구현을 전파한 사실을 말하였다. 결국 바르트가 그라스도의 부활을 육체부활로는 거부하였으나,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심적인 새 변화를 부활로 보았다.

사실 부활절 새벽에 제자들의 마음에 일어났던 심적인 변화는, 인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큰 사건임은 분명하다. 로마 정부와 헤롯왕이 합세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아 죽였으나,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였다는 전도의 불길이 순식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와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퍼져나가, 결국 로마 정부를 정복하였고, 유럽 전체를 정복한 사건은, 사망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살아 나온 강렬한 육체부활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Karl Barth는 이러한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강렬한 힘을, 무덤에서 살아난 육체부활에서 찾지 않고, 예수의 사랑과 정의구현에서 찾았다.

바르트의 부활론에 대한 평가

당시의 노예제도하에서는 힘없고, 미개한 민중이 자기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도 정부를 대항하여, 궐기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하물며 자기의 목숨과 전혀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사랑과 정의구현을 위해, 민중이 궐기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자의 밥으로 던져지며, 온갖 고문을 다 당해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역사도 육체부활과 내세를 믿는 성도들만이 순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을 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육체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지 않는다.

오늘날 마호메트교가 왜 선교에서 무섭게 성장세를 보이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내세의 지옥과 천국을 믿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자살폭탄 속에서 장렬히 죽어 가는가? 하나님의 심판과 내세의 지옥과 천국을 믿기 때문이다. 과거나 현재나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힘은 오직 육체부활과 내세와 영생을 믿는데서 왔고, 또 오고 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주장은 당시의 상황에 맞지 않는다. 성서에 의하면, 제자들이 사자의 밥으로 던져져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예수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 아니고, 정신적인 부활이니, 결국 제자들이 거짓 부활(육체부활)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사형장으로 끌려간 것이 된다. 인간이란 참 말을 주장하다가도, 그 참 말 때문에 죽음이 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죽음을 피해가는 것이 상식인데, 거짓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사형장으로 가는 일이 가능한가?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만일 제자들이 미쳤기 때문에, 없었던 몸의 부활을 거짓으로 주장하면서 사형장으로 갔다고 쳐도, 어떻게 12사도가 한꺼번에 다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500여 형제들이 목격했던 부활체의 승천장면은, 또 무엇이라고 괴변을 말한 것인가!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상에서 누리는 승리와 구원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승리가 그의 아들의 인격에서 이미 쟁취되었다는 주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왔다. 부활은 확실히 우리들의 소망의 보증이고, 더욱이 이 소망의 미래는 부활절 사건에서 현재로 와 있다. 부활절은 이미 획득된 승리의 선포이다. 아직은 군사들이 항복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기에, 여기저기서 사소한 총소리는 들리고 있지만, 전쟁은 끝났다. 경기는 이겼다. 그러나 경기자는 아직 두어 가지 항목을 더 해야 된다. 실제로는 그의 힘은 다하였다. 아직 시계의 방울은 두어 번 더 흔들려야 하지만, 시계가 이미 멈춘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중간 지역에 살고 있다. ‘저 옛 것은 지나가고,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라는 부활절 사실은 우리의 적과 죄와 저주와 죽음이 패배 당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결국 이 적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해를 가하지 못한다. 적들은 아직 싸움이 판가름 나지 않은 것처럼, 즉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지 않은 것같이 행동하고 있어서 우리가 아직까지 그것들을 관심에는 두고 있으나, 결코 더 이상 그것들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부활절 소식을 듣는다면, 더 이상 비통한 얼굴을 하지 아니할 것이며, 소망 없는 우울한 생을 살지 아니할 것이다. 오직 예수가 승리자라는 이것 하나만이 타당하고, 진정으로 중요하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다 본 것 같은 엄숙성은 기독교인의 엄숙성이 아니다. 뒤에서 불이 붙을지라도, 참으로 불붙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보아서는 안 되고, 다른 것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인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엄숙히 생각하며, 그를 기뻐하도록 우리가 초청과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감사의 생활을 할 것이며, 두려움 속에 살지 아니할 것이다.」46


이 인용문의 주제가 무엇인가? 이 인용문의 주제는, 부활절이 주는 메시지인데, 부활이 주는 메시지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승리가 “예수의 인격에서 쟁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을 위한 승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쟁취되었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범생활에서 쟁취되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해온 교리이다. 바르트는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인간이 소망하는 승리도, 십자가 대속에서 성취된 지옥의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에서의 해방이 아니고, 다만 “예수가 승리자라는 것”과, “옛 것은 다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이 긴 인용구절은 세계 평화가 아직은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곧 완성될 것이 확실하니, 믿자고 하였다. 아직은 뒤에서는 총소리가 들리고 불이 타고 있어도,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고, 비통한 얼굴도 하지 말 것이며, 소망 없는 자처럼 우울한 생활을 해서도 안 되고, 앞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어둠을 벗어나 기쁨으로 살자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부르짖은 신학은 절대적인 희망이었다. 이 절대적인 희망은 20세기의 모든 신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신복음주의 신학들이 외쳐온 복음이다. Moltmann이 “희망의 부활”(Resurrection as Hope)에서 말한 희망과, Pannenberg가 설화의 계시(Offenbarung as Geschichte)에서 말한 희망은 같은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부르짖은 희망은 하나의 부르짖음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제1,2차 세계대전이 보여준 대로,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보통 인간 예수로는 인성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옥과 천국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할 때에만 비로소 인성회복이 가능해진다.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속죄의 복음을 받아드려 구원받았을 때에, 율법과 계명에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감심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복종하여, 순교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에게서는 윤리가 살아나고 인성이 회복되어진다.

지옥에 갈 인간이 구원받아 새 인간으로 탄생하여 인격혁명이 일어난 다음에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여 이웃을 해치는 일이 없고, 사랑하여 이롭게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사는 사람에게서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양보하고, 용서하고, 인자하고, 겸손하고, 사랑하여 악한 상대도 용납함으로 악한 자와도 관계가 끊어지지 아니하며, 비로소 평화가 정착되어진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명하셨기 때문에 순종에서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 사이의 화목과, 집단 사이의 평화의 정착은 두 당사자를 동시에 복종시키는 하나님을 모실 때에 가능해진다. 참 인간의 회복은 살아계신 만물의 창시자(originator) 하나님, 속죄와 구원의 하나님, 죄를 심판하여 영원히 형벌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이 하나님에게 순종할 때에, 가능해지는 진리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는 명백성 있는 진리이다.


      Note

33. 칼 바르트, 학생의 질문과 신학자의 대답, 기독교사상, 1962년 1월호, p. 70
34. Karl Barth, Letters(1961-1968), p. 9 tr. by Geoffrey W. Bromiley, Eerdmans.
35. Karl Barth, Dogmatics in Outline, p. 154, Happer and Row
36. Karl Barth, 바르트 교의신학 개요, 전경연 번역, 대한기독교서회, 1986
37.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4, p. 569, T and T Clark
38.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2, p. 148 ; Die Kirchliche Dogmatik, IV/2, p. 165
39. 설화(geschichte)는 신화와 전설이 섞여 쓰인 "옛 이야기-고대소설"을 뜻한다.
40. K. Barth, Church Dogmatics, IV/2, p. 148
41. K. Barth, Church Dogmatics, IV/2, pp. 148-149; Die Kirchliche Dogmatik, IV/2, pp. 165-166
42. 칼 바르트, 바르트 교의학 개요, 전경연 번역, 성문학사, 1986, p. 174
43. 영역에서 원문의 geschichte를 history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바르트는 역사(history)만을 historie로 표기하였고,
      설화(narrative)는 반드시 geschiche로 표기하였다. 필자가 저술한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dptj,
      "Geschichte의 의미"를 참조할 것.
44. K. Barth, Dogmatik Im Grundriss (German version), p. 143 ; Ibid., Korean version, p. 176; Ibid., English version,
      p. 122
45. K. Barth, Dogmatik Im Grundriss (German version), 한국어 번역판, 바르트 교의학 개요, p. 76; 영어번역판,
      Dogmatics in Outline, p. 122
46. Ibid., 한국어번역판, pp. 176-177; 영어번역판, p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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