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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윤의 구원론   < 그리스도의 대속(Redemption)이 없는 기독교 >       한종희 목사



8. 구원의 종말적 구조     (김세윤, pp.31-51)

우선 “구원의 종말적 구조”에서 김 교수가 언급한 작은 항목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예수님의 부활은, 사탄의 등뼈를 꺾은 사건이다. pp.84-88
⒝ 성령은, 구원의 첫 열매에 대한 보증이다. pp.88-92
⒞ 믿음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재이다. pp.92-97
⒟ 고난은, 믿음이 실재화 되어가는 과정이다. pp.97-100
⒠ 제자도는, 믿음의 종말론적 구조 속에 들어 있다. pp.100-103
⒡ 믿음의 삶은, 아들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pp.103-105
⒢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새 생명이 강해지는 과정이다. pp.105-106

제목으로 제시한 “구원의 종말적 구조”기독교의 종말론에 해당하지만, 작은 항목 7 항목의 해설에서, 성서가 말하는 종말 징조들은 단 한 가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재림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성서가 말하는 재림 징조들은 한 가지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김 교수가 말한 것은,

⑴ 사람들이 착해져가는 과정과,
⑵ 지상에 천국을 건설해 가는 과정과,
⑶ 종말에는 반드시 지상에 천국이 임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장한 것뿐이다.
⑷ 그래서 김 교수가 자신의 종말관을 독특한 기독교의 종말관이라 칭하였다 (p.83).

그러나 다음의 해설들은, 마치 김세윤 교수가 공중 재림을 믿고 말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 예수님의 부활로 사탄의 등뼈가 부러졌다(p.85).
⒝ 예수님이 재림하여, 사탄을 발등상 삼을 때, 구원이 완성된다(p.85).
⒞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성화의 과정이 종결되어진다(p.103).
⒟ 언젠가는 하늘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우리의 천한 몸을 그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라는, 위대한 소망을 우리는 갖고 있다.(pp.104-105)

그러나 김 교수가 성서가 말하는 종말을 불신하기 때문에,“구원의 종말적 구조”에서 성서가 말하는 종말 징조는 단 한 가지도 말하지 않았다. 다음은 성서가 말하는 종말 징조들이다.

⒜ 종말에는 불법이 성해지면서 사랑이 식어지고, 형제가 형제를 고발하고 죽인다.
⒝ 종말에는 사탄의 배교활동이 지구를 덮어서, 참 성도들은 다 순교한다.
⒞ 종말에는 재앙과, 생태계의 파괴가 점차 확대되어 생물이 죽어가다가, 최후를 맞는다.
⒟ 종말의 종말에는, 그리스도가 철장으로 심판하여, 인류와 문명이 불타서 망한다.
⒠ 종말의 종말에는, 살아있는 자는 새 몸을 입고, 사자들은 무덤에서 살아나 심판받는다.
⒡ 최후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사탄과 함께 영원한 형벌에 들어간다.
⒢ 최후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낮과 밤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에 들어간다.

김 교수와 진보주의 신학자들은 성서의 종말징조들은 불신하기 때문에, 절대로 주장하지 않는다. K. Barth가 9,000여 페이지의「교회교의학」(Die Kirchliche Dogmatik)을 31권으로 출판했지만, 성서가 말하는 종말론은 쓰지 않았다. 신복음주의 신학자 Carl Henry도 3,000여 페이지가 넘는 책(God, Revelation and Authority)을 6권으로 출판했지만, 성서가 말하는 종말론은 쓰지 않았다. 김세윤 교수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종말론도 성서의 종말론이 아니다. 믿지 아니하는 내세를 어찌 말하겠는가! 내세불신이 현대신학의 첫전제(first presupposition)이다.




9. 종말과 구원 36


「 이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인 종말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종말론에 대해, 바울은 4장13-18절과, 5장 1-11절, 두 부분에서 설명을 합니다. 」 37


김 교수는 자신이 저술한 책,「데살로니가전서 주석」에서 바울의 종말관을 해설하여, 정통신학의 부활관을 배격하고, 자신의 부활관을 주장하였다. 김세윤 교수가, 바울의 종말관을 어떻게 해석하여, 자신의 부활관을 주장했는지 보고자 한자.


1) 성서의 재림해설에서, 문자적 해석은 배격하고, 상징적 해석을 취하였다


「 또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라”는 말씀을 보면, 하늘의 하나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의 굉장히 웅장하고 영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주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종말의 모습을 얼마나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진짜 문자적으로 그렇게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상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림이요 이미지들입니다. 이런 언어로 그려진 본문이 담고 있는 신학적인 뜻이 중요합니다. 」 38

「 성경 본문, 특히 주의 승천재림에 관하여 묘사하는 언어들은 상징적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 . 따라서 성경 기자들은 자기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유비은유 39와 그리고 상징 언어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40


성경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라”고 하였지만, 김 교수가 이 공중재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묻고, 공중재림을 문자적으로 보거나,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유비나, 은유상징으로 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통신학은 성령수태와 육체부활을 실화(nonfiction)로 믿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해석하듯이, 공중재림도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믿고 공중 재림을 기다리지만, 김 교수는 성령수태와 육체부활을 실화로 믿지 않듯이, 공중재림도 실제로 성취될 예언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공중재림그림은유상징으로 보고 해석하였다.


2) 상징적 해석의 실제

다음은 김 교수가 "살전 4:16"을 상징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 그러므로 여기서 16절의 “내려오다”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주께서 저 위에서 내려오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늘의 우주론의 관점으로 본다면, 내려오고 올라가는 게 어디 있습니까? 어디를 기준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땅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 오르고 내려간다는 개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 . 성경적인 언어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높임받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높임받음을 가리킵니다. 또 내려오심은 그의 높임으로 인해 얻으신 신적 영광으로부터 오신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 . 그래서 예수의 승천을 그의 ‘떠남(departure)’으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편에 가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높임받음”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성경 본문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 그의 존재 양식이 이제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초월적 존재 형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신학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 . 」 41


주의 승천과 재림에 관하여 묘사하는 언어들로서 올라간다, 내려온다고 말한 것을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주의 승천과 재림을 올라간다 내려온다고 묘사한 것은, 옛날 사람들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여 잘못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올라간다는 말은 높임 받음을 뜻하고, 내려온다는 말은 높아진 신적 영광으로부터 오신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김 교수가 정통신학이 믿는 문자적인 승천과, 문자적인 재림을 배격하고, 공중재림과 승천을 상징으로 해석하여, 주께서 높아지고, 높아진 영광을 입고 오시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존재양식도 문자적인 존재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즉 주께서 문자대로 부활했거나 승천한 적이 없으니, 시공간 안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 존재형식도 시공간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즉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양식은 어떤 형식으로 존재함을 말하는가? 김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수태한 적이 없고, 육체로 부활한 적도 없고, 하늘로 승천한 적이 없는 보통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도 다른 보통 인간들처럼 죽고, 무덤에 묻혀 썩어지고 끝난 것이지만, 다른 보통 사람들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과 정신과 주장이 지극한 영광을 입고, 사도들의 마음과 만민의 정신 속에 살아나서, 2천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온 지구를 덮어, 세계에 화해와 평화와 지상낙원을 가져올 것이라는 뜻이다. 이상이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을 문자대로 보지 않고, 상징으로 보아 해석한 내용이다. 동시에 승천과 재림에 대한 이 상징적인 해석이 곧 김 교수의 종말관을 대신하고, 현대신학의 종말관을 대신한다.


3) 종말신학의 핵심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 종말 신학의 핵심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42 라고 하였다. 종말신학에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감 교수는 예수의 공중 재림과, 내세를 믿지 않는다, 그러면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다음을 보라.


『 살전4:17절의 마지막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바울의 결론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든, 아니면 땅 위에서 요한계시록같이 갱신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내려와 살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에게 있어서는 위로 올라가든 밑으로 내려오든,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단지 상징적인 묘사일 뿐입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함,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입니다. . .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것입니다(참조, 빌1:23; 고후 5:8)
종말에 있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온 세상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따로 있고, 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 땅이 하나님의 거처지가 됩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거처지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자나 죽은 자나, 다 같이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미 참예한 모든 성도가 재림 때에, 주의 영광과 통치하심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롬5:17; 고전4:8; 참조, 계5:10; 22:5; 마13:43; 롬8:17). 주와 함께하게 된다는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43 


김 교수는 “우리가 위로 올라가든, 밑으로 내려오든, 이러한 표현은 단지 상징적인 묘사임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공중재림은 상징적인 뜻이 있을 뿐, 실제의 상황을 말한 것이 아니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니, 육체부활 후에 있었던 승천과 공중재림과, 신천신지의 천국도래를 다 부정하는 주장이다. 그 대신 종말이 오면,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니,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고 하였다. 종말이 오면 하나님이 지구를 채우고, 이 우주가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정신과 주장이 지구를 덮어 지상낙원이 올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자나 죽은 자가, 다 같이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미 참예한 모든 성도가 재림 때에, 주의 영광과 통치하심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롬5:17, 고전4:8. 참조, 계5:10, 22:5, 마13:43, 롬8:17).


김 교수가 이 주장을 할 때에, “죽은 자”에 대한 해설 없이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 주장이 마치 내세의 영생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신성(神性)이 없었고, 육체부활이 없었고, 부활체의 승천과 재림이 없었고 공중재림이 없었으니, “죽은 자”도 도덕적으로 죽은 자가, 도덕적으로 살아난 자를 말한 것이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다”는 표현도, 지상에서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교훈을 지킴으로, 전쟁과 파멸 없이 평화 속에서 살아갈 것을 말한 것이다.


10. 결     론

1) 예수는 도대체 어떤 메시아인가?   (메시아가 주는 구원은 어떠한 구원인가?)   pp.170-173

“예수는 도대체 어떤 메시아인가”는 김 교수가 쓴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의 끝 부분에서 말한 책의 총 결론 제목이다. 이 결론의 내용은, “메시아가 주는 구원은 어떠한 구원인가”이다. 책의 제목이 구원론이었으니, 책의 결론도 구원론으로 마감한 것이다.

2) 해설과 비평

김세윤 교수가 그리스도의 품성에서 신성은 폐기하고, 인성만을 주장하였으며, 구원관에서는 내세를 폐기하고, 현세만을 주장하였으니, 김 교수가 믿는 그리스도는 보통 인간이고, 김 교수가 믿는 구원은 착하게 살고 간 예수를 본받아 착하게 사는 것이다.


  『 오늘 우리가 다룬 문제는,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신학 논쟁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해방신학이 요구하는 메시아 또는 그런 신학이 그려 내는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지금 여기서 좀 더 많은 정치적 자유, 좀 더 많은 사회적 정의, 좀 더 경제적 여유 등등 이런 것들을 가져다주는 분이 아닙니까? 보수신학은 해방신학의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항하여 또 다른 극단으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영혼과 육신을 가르고, 금세와 내세를 엄격히 구분하는 이월론적 사고에 젖어, 이 세상 또는 육신은 소용이 없는 것이라며, 내세에서의 영혼 구원에만 집착하기도 합니다. 해방신학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 세상의 가치들로만 축약시켜 버린다면, 보수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내세워 이른바 영혼의 영역으로만 축약시키곤 합니다. . . . 』(김세윤, pp.170-171)



김 교수가 자신의 구원관을 해방신학과 정통신학과 비교하였다. 해방신학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이고, 구조적인 악에서 해방을 강조하고, 정통신학은 해방신학에 대항하여, 이월론적인 내세구원에만 집착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신학을 부정하고, 자신의 구원관을 제시하였다. 다음은 김 교수가 주장하는 구원관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 세상의 몇 가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들에 축약시켜서도 안 되고, 이 세상과는 별개의 무슨 영혼 구원만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의 피조물들을 창조주 하나님께 연합시켜서, 우리가 그 분의 신적인 삶, 즉 죽음(고난들)의 이면이 없는 온전한 삶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지금 여기서 벌써 확대되는 자유, 의, 사랑, 풍요, 건강 등으로 구체적으로(그러나 불행히도 단편적으로!) 그 힘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 세상의 몇 가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들로 축약한다면, 우리도 ‘육신적’메시아 사상에 빠지게 되는데, ‘육신적’ 메시아사상은 앞서 본 대로 역설적이고 그 기치들조차도 확보하지 못하고 맙니다. 반면 그의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은 우리에게 종말의 완성 때의 영생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써 그 영생의 힘을 우리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pp.172-173)



이것은, 김 교수의 구원관이다. 김 교수가 주장하기를, 기독교의 구원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가치에 있지 않고, 내세의 영혼구원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는 것은, 죽음(고난)이 없는 삶이요, 신적인 삶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는 고난 없는 삶, 신적인 삶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구원은 지금 여기서 벌써 확대되는 자유, 의, 사랑, 풍요, 건강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 신적인 삶이 불행히도 지금은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재림 때에는 완성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신적인 삶이 지금은 단편적이라 함은, 지금은 인류 가운데 한 부분만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재림 때에는(세상 끝 날에는), 전 이류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날이 올 것이라는 뜻이다. 김 교수의 해설에 풀어야 할 문제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김 교수가 재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김 교수가 앞에서 이미 정의를 내렸듯이, 재림정통신학이 믿는 공중재림이 아니다. 끝 날에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교훈으로 충만하여져, 지상낙원이 이루어질 것을 말한 것이다.

둘째,  ‘육신적’ 메시아사상은, 앞서 본 대로 역설적이고 그 가치들조차도 확보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육신적’ 메시아사상이 역설적이라 함은, 예수가 육체로 부활하고, 육체로 승천하고, 육체로 재림한다는 메시아사상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억지 주장이라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육체의 부활이나, 육체의 승천이나, 육체의 재림으로 믿지 않는 김세윤 교수에게는, 육신으로 부활하고 육신으로 승천하고 육신으로 재림한다는 ‘육신적’ 메시아사상이 역설일 수밖에 없어서 한 말이다. 역설이라는 용어를 현대신학에 처음에 적용한 사람은 S. Kierkegaard(1813-55)였다. 키에르케고오르는 초자연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령수태, 육체부활 등 일체의 기적들을 역설이라 하였다.

셋째,  『 우리의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은, 우리에게 종말의 완성 때의 영생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써 그 영생의 힘을 우리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p.173)

“우리의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은, 종말의 완성 때의 영생을 보장해 준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세상 끝 날에는 전 인류가 온전히 하나님과 일치한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지상낙원을 이루어 자손대대로 영원히 평화롭게 살 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에 또 말하기를, “지금 여기서 벌써 그 영생의 힘을 우리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존은 “죄를 벗은 인간”을 뜻하고, 따라서 ‘실존의 모든 영역’은 ‘죄를 벗은 모든 인간의 세계’를 뜻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죄를 벗은 모든 인간의 세계에서, 전 인류는 자손대대로 영생을 누리며 살 것이라는 뜻이다. 이상으로 들어났듯이, 김 교수가 모든 항목에서 초자연을 폐기하고, 새 신학을 구성하였으니, 이것이 김 교수의 신학이다. 김 교수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보통 인간으로 보고, 보통 인간 예수를 모델로 한 윤리종교였다.

김 교수가 신학을 해설할 때에, 직선적이거나 노골적인 표현을 하지 않고,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철학적이고 함축적인 용어와 난해한 용어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필자가 제대로 해독하는데도 수년이 걸렸으니, 독자들이 이해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왜 쉽게 쓰지 않고, 이해하기 힘들게 썼는가? 정통신학을 부정하는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가려서, 정통신학을 믿는 교인들과 신학생들과의 정면충돌을 막기 위함이었다. 특히 정통신학이 지배하는 한국교회와 한국 신학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내세를 부정하면, 배교자로 규탄 받아,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고, 교단에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감신대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가 면직된 사건은 한국교회의 정서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우리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신학도 반드시 전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 신학은 하나님의 천지만물 창조를 전제하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정통신학을 불신하고 반대하는 자연신론, 이성신학, 윤리신학 등이 17세기 이후로 영국과 독일에서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특히 18세기에 꽃피운 계몽주의가 19세기를 거치면서 인류 전체에 파급되었고, 기독교는 자유주의로 변질하였으며, 20세기에 와서는 계몽주의가 인류의 문화와 철학과 신학을 송두리째 삼켰다. 결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만물창조를 전제하듯이, 현대신학과 진보신학은 하나님의 만물창조가 없는 계몽주의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이나, 신학자나, 목사든 반드시 전제가 있는 것이니, 먼저 그 전제를 알고, 대해야 한다. 그 다음은 피나는 노력이다. 진보주의 신학들은 내세를 믿지 않지만, 내세를 믿는 교인들과 신학생들을 상대하여 설교하고 책을 써야 하기 때문에, 내세를 믿지 않는 사실을 강단과 책에서 덮고 은폐해야 하므로, 온 갓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을 덮고 은폐하는 고로, 피나는 노력 없이는 그들의 정체성을 알아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Note

36. 김세윤, 데살로니가 전서 강해, pp.165-196, 두란노, 2002
37. 같은 책, p.167
38. 같은 책, p.186
39. 인용문에서 말한 은유, 유비도 다 비유를 뜻하며, 상징으로 해석한다.
40. 같은 책, p.188
41. 같은 책, pp.188-190
42. 같은 책, p.190
43. 같은 책,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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